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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느낀 감회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상실감이었다. 한때 내 존재의 전부를 품어 주던 집과 마을과 들과 숲과 길이 아주 작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건 내가 큰 세상으로 나와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게 아니라 고향에 대한 기억과 실감이 유실되고 마모되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인식에서 오는 듯했다. 고향은 조금씩 비워져서 그 항아리 전에 얼굴을 대고 누구를 부르면 공허한 메아리가 울릴 것 같았다. 간혹 어느 울타리, 고목, 바위, 그리고 노인들 앞에서 발걸음이 붙들려 서 있어도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이제 왔느냐는 자문이 떠나지 않았다.
고숙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찾은 귀향길이었다. 산판을 벌이던 고숙은 삼십 년 전에 세상을 등졌다. 한때 뺨을 끌어다가 맞대었을 그분에 대한 어떤 애틋한 기억도 내게는 흩어지고 없었다. 파묘는 보지 못하고 유골을 화장하는 자리만 지키게 되었다. 윤달이라 산일이 많았다. 고숙의 유골은 화장장으로 못 가고 문중 납골당 마당에서 가스불로 태워졌다. 두 됫박쯤 되는 유골이 한 시간 남짓 동안 몇 줌의 골분으로 화하였다. 산일을 거든 두 노인이 고인을 아주 좋은 유택(幽宅)에 모셨더라며 덕담을 건네었다. 베옷은 썩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자루를 털 듯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노라 했다.
무릎을 앓는 고모는 마당 한편에 앉아 덤덤하였다. 남편 떠나고 홀로 남아 자녀들을 키우며 늙어온, 내일 모레가 팔순인 노인네였다. 제상에는 며칠 전 손수 갯벌에서 캐온 꼬막이 한 접시 수북했다. 고모는 기와를 올려 반듯하게 지어 놓은 문중 납골당을 바라보며 “해마다 벌초 다니기 귀찮았는데 이제 그 양반을 호텔로 뫼시니 시원하다.”고 아쉬운 마음을 돌려놓고는 하였다. 나는 뒤돌아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볕 바른 곳마다 각성바지 문중들의 제각이 올돌했다. 산 사람들이 깃든 농가들은 낡았고 제각은 새집처럼 번듯했다. 그건 마치 고향의 운명을 상징하는 풍경 같기도 하였다.
화장하고 제를 올리는 동안 나는 문중 납골당으로 발걸음을 들였다. 흡사 진열장 같은 벽면에 유골단지 육십여 기가 가지런히 안치되어 있었다. 고모 말마따나 사자들의 호텔 같았다. 한 칸에 유골단지가 두 개씩 든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부부를 납골한 곳이었다. 유골단지에는 성명과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한말 사람도 있고 최근 사람도 있었으며, 천수를 누린 이가 있는가 하면 아까운 나이에 생을 버린 안타까운 생도 있었다. 한날한시에 함께 간 부부는 없어 보였다. 고숙에게 형제가 여럿이었다는 사실도 나는 처음 알았다. 왠지 생로병사의 고행을 맛본 사람처럼 나는 쓸쓸하였다.
고숙의 유골을 안치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어린 날 고모를 찾아가던 어렴풋한 길을 밟아 고모 집으로 갔다. 역시나 기억보다 작고 초라한 집이었다. 마루와 부엌을 손보기는 하였으나 고모의 집과 살림은 주인처럼 닳을 대로 닳아 있었다. 비뚤어진 기둥의 골격이 도배지로 드러나는 좁은 안방 바람벽에는 고종사촌들의 결혼식 사진과 조카들의 돌잔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때 고모는 그 작은 방에서 아이들을 낳았고 또한 숨 거두는 남편을 임종했을 것이다. 배우자를 보낸 그 자리에서 홀로 늙어 가는 게 인생인데 새삼스럽게도 마치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양 먹먹하였다.
마당의 빨랫줄에는 장마에 내놓은 빨랫감들이 늘어져 있었다. 빨랫줄은 처마와 감나무가 한 끝씩 붙들고 있었다. 마당가에 선 감나무는 그저 과실을 내놓는 나무가 아니라 가난한 집의 살림을 거드는 한 마리 충직한 짐승 같았다. 감나무 역시 고모와 더불어 아프고 고달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쓸쓸한 마음이 꼭 사람을 처지게만 하지는 않았다. 그 쓸쓸함 가운데에서 나는 왠지 마음이 충만해지기도 하였다. 태어나고 죽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존재의 존엄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목숨을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어린 자식들을 보고 있을 때 불현듯 들곤 하던 낯선 마음 같기도 했다. 나는 생이 덧없고 외롭고 비루하다는 마음을 고모 집 빨랫줄에 걸어 두고 내 살림이 있는 곳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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