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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난 둘째아이는 이제 막 말문을 텄다.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재잘거린다. 예측불허의 질문이 많다. 아빠 이마를 짚으며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느냐고 묻기도 하고, 욕조에 들어앉았다가 물속에는 왜 물이 들어 있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구름 위와 땅속에 누가 사느냐고 묻는다. 수염이 없으면? 고추가 없으면?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하여 의문스럽지 않은 일들이 세상을 막 보기 시작한 아이에게는 온통 궁금한가 보다.
아이의 입을 통해 나는 내가 잃어버린 "최초의 감각"을 회복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때 나도 그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를 향해 말랑말랑한 혀를 내밀었을 것이다.
아이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아직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그와 대화하려면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웃들은 아이의 말을 다 알아듣는 우리 부부가 오히려 신통하다는 반응이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급적 나는 황당하고 무서운 얘기를 많이 들려준다. 밤 열시가 넘어도 잠들지 않은 아이를 잡아간다는 망태 할아버지가 창가를 배회하며, 인근 선사 유적지는 도깨비 마을이며, 구름 위에는 산타 마을이 있고, 눈 공장이 있다.
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동화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이 나이 때 아이들은 특정 책에 빠지면 며칠이고 반복해서 읽어 주기를 원한다. 지겨운 일이다. 때로 동화책을 읽다가 내가 먼저 잠에 들어서 장화홍련이 호박 마차를 타고 궁전 무도회에 가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정정해 준다. 때로는 아이들이 아내를 재워 놓고 내 방으로 건너오기도 한다.
요즘 작은아이는 "파워레인저"에 빠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마징가 제트"나 "로봇 태권V"에 열광했듯 아이도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영웅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워레인저를 흉내 내서 아빠와 엄마와 형을 혼낸다. 작은아이는 장차 파워레인저가 되는 게 꿈이다. 파워레인저가 되기 위해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가기 싫은 놀이방을 간다.
작은아이를 파워레인저의 세계로 이끈 것은 여섯 살 난 큰아이다. 장난감과 텔레비전과 파워레인저 놀이로 동생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동생이 말을 듣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파워레인저를 틀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할 정도다. 아내는 파워레인저에 불만이다. 새로운 버전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이 그것들을 갖고 싶어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두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열심히 기도를 했다. 큰아이는 파워레인저 "다이노 킹" 세트를, 작은아이는 파워레인저 "탱크 건"을 선물해 달라고 기도했다. 요즘 장난감들은 너무 비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값이 더 오른다. 아내는 조금이나마 저렴한 가격으로 구하느라고 인터넷을 뒤져 주문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택배로 선물이 도착했는데 그것을 그만 큰아이가 발견하고 말았다. 아직 큰아이는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아서는 안 될 나이다. 아내는 아이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택배로 먼저 보냈다고 둘러댔다. 아이는 선물에 혹해서 믿는 눈치다. 큰아이는 친구들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바빠서 택배로 선물을 보내 주었다고 자랑한다.
작은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경이로워하는 곳은 슈퍼마켓이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고 믿는 눈치다. 그곳에서는 원하는 것을 모두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겨울에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나는 집을 등기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우리에게 아파트가 생겼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건 "우리 집"이 아니라 "아빠 집"이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아빠 집"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겁박하고 있다. 아이들은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작은아이는 간혹 이웃들에게 “우리 아빠는 슈퍼에서 집 샀어요” 하고 자랑한다.
아이들에게 심어 준 거짓된 이야기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빠와 엄마가 지어 낸 이야기라는 사실도 모른 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어 갈 것이다. 다만 아빠가 지금도 파워레인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까. 파워레인저처럼 힘이 센 존재로 "변신"하고 싶은 아빠를. 그리고 나는 이런 것도 꿈꾼다.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정말 집을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