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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마지막 얼굴, 마지막 희망
kklist21 | 추천 (0) | 조회 (597)

2010-05-16 00:28

미얀마의 작은 섬에 살고 있는 "올랑 사키아"라는 부족은 나이를 거꾸로 센다고 한다. 이를테면 갓 태어난 아기의 나이는 60살이고, 해마다 나이를 한 살씩 줄여 가 60년 뒤에는 0세가 된다는 것이다. 또 만약 0세보다 오래 살 때는 덤이라고 하여 다시 10살을 더해 주고, 거기서부터 다시 한 살씩 줄여 준단다. 맛도 없이 꾸역꾸역 먹는 나이 때문에 해가 바뀔 때마다 한숨을 쉬며 달력을 교체하는 사람이라면 미얀마로 떠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다. 60대 중반이고, 위암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가족의 자격으로 할머니의 염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주검은 아주 작았다. 세 살배기 떼쟁이를 업어 키운 할머니, 자취를 한답시고 제대로 밥도 챙겨 먹지 않는 손녀딸을 위해 상경해 매일 아침 따뜻한 아침밥을 지어 주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수의를 입고 염포에 꽁꽁 묶여 동그마니 누워 있었다. 엄마는 그 동안 사다 준 새 옷이며 새 신발을 입거나 신어 보지도 않은 채 장롱 깊숙이 간직해 둔 할머니를 욕하며 울었다. 나는 너무 작아져 버린 할머니가 낯설어 눈물마저 흘리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요즘 부쩍 부고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예고된 것이든 뜻밖의 것이든, 모든 이별은 갑작스럽고 슬프다. 그래서 독일의 작가 베아테와 사진가 발터가 호스피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마지막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펼쳐 들 때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어떻게 죽음을 통해 희망을 말한다는 것인가? 말기 암 환자들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모습을 찍었다니, 너무 잔인하고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묘하다. 죽음의 실체를 더듬어 갈수록 마음은 점차 평온해지고, 실제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미소를 머금었다. 호스피스 병원은 엄연히 "죽어 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것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삶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나 슬프지만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살고 있는 장소, 두려움과 고통이 있지만 웃음과 음악도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바로 호스피스 병원이다.

자신의 평균적인 삶을 기꺼워하는 통계원 뮐러는 평균수명 74세보다 겨우 3년 일찍 죽는 것뿐이라며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17개월 된 딸을 소아암으로 떠나 보내며 엄마는 “어쨌든 살아 보기는 했으니까 됐어.”라고 중얼거린다. 마지막 말로 “안녕, 내일 보자!”며 인사하고 떠난 베르벨이 있는가 하면, 56년을 함께 살아온 폭군 남편과 마지막으로 화해하고 떠난 80세의 베닝 할머니도 있다. 51세의 바르바라는 죽어라 일만 하다 이제 좀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려 하는데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만약 기적이 일어난다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죽음은 더 이상 금기나 터부가 될 수 없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하며 매일 죽음을 접하는 간호사는, 죽음에 대한 생각과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그 진실을 증명하듯 57세의 볼프강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몸으로 느끼고 있는지 말한다.

“한 번도 구름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달라 보인다. 구름도 꽃병의 꽃도, 갑자기 모든 게 소중해졌다.”
그리하여 호스피스 병원은 뜻밖에도 가장 강렬한 "희망의 둥지"다. 힘겨운 삶이나마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픈, 고통의 완화와 간호를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하고픈, 통증 없이 편안하게 죽고 싶은, 죽음이 영영 끝이 아니라 변화이자 새로운 시작이길 바라는 희망.

방금 막 숨을 거둔, 고단한 여행을 끝내고 비로소 왔던 곳으로 돌아간 그들의 얼굴은 평화롭다. 생전에 독하게 부릅떴던 눈을 조용히 감고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잠 속에서 그들은 모두 아기처럼 보인다. 내가 본 외할머니의 모습도 그러했다. 그래서 아주 슬프지만은 않았다. 이제는 고통도 번민도 없는, 영원히 무구한 0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