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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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17:45
세상사에 상처받았을 때, 사람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오직 의지해 기댈 곳은 자연뿐이다. 머리가 복잡하고 심란할 때면 나는 운동화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풀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평소에 산책하던 만큼 걷고도 마음이 여전히 진정되지 않을 때는 시간을 좀 더 늘린다. 아무래도 생각이 정돈되지 않으면 터벅터벅 천천히 걷기보다는 땀이 흐르도록 빠르게 걷는다. 그래서 이사를 할 때면 최우선으로 세 가지를 따진다. 아이의 학교에서 멀지 않을 것, 도서관이 가까이 있을 것, 주위에 공원이나 산책로가 있을 것.
걸으면서 계절을 만난다. 그 계절 속에 나고 지는 숱한 생명들을 만난다. 누군가 “철이 든다.”는 말은 “절기를 안다.”는 뜻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저 덥고 추운 날만 있는 게 아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어 변한다. 때가 되면 꽃이 피었다 지고, 때가 지나면 숨탄것들이 났다가 사라진다. 사람의 한 살이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들끓던 갈등이나 욕심 같은 것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고개를 숙이면 비로소 낮아진다. 낮아져서, 평화롭다.
얼마 전부터 길가의 화초가 봉오리를 맺기 시작했다. 이파리의 모양은 낯설지 않은데 이름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다. 팔을 뻗어 손끝으로 그 봉오리를 매만진다. 하이파이브를 하듯 스쳐 지나며 그에게 가만히 물어본다.
“그 봉오리 속에 무얼 감춘 거야? 넌 대체 어떤 꽃을 피울 거니?”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리석고 가장 잔인한 것이 전쟁이다. 그것이 어리석고 잔인한 이유는 채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들을 마구 자르고 짓밟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원했던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오직 고통과 상실뿐이다. 그래서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천 개의 찬란한 태양>(현대문학)을 읽는 내내 내 가슴엔 슬픔의 포화가 자욱했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약하기에 죄 없이 희생당하는 여성들과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9.11테러와 탈레반과 전쟁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때 그곳은 찬란한 문명이 싹트고 세련된 문화가 꽃핀 터전이었다. 소설의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름다운 기억과 쓰라린 아픔을 동시에 겪으며 살아간다. 한 남자의 두 아내가 된 그들은 종교와 정치 권력에 의해 학대당하고 폭력에 시달린다. 소설은 타인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매개이다. 그들이 두들겨 맞고 어둠 속에 갇힐 때 나 역시 캄캄한 절망을 느꼈다. 나도 그들처럼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치고 싶었다. 세상은 어찌하여 이렇게 가혹한가? 우리는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하지만 그토록 폐허가 된 황무지에서도 용케 싹을 틔우고 봉오리를 밀어 올리며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 전쟁과 상처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아이들은 태어나고, 여자들은 그들을 끌어안고 젖을 먹인다. 언젠가 들었던 아메리칸 인디언 샤이엔 족의 속담이 떠오른다.
어느 부족도 패망하지 않는다.
그 여인네들의 용기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는.
제 아무리 용맹한 전사들과 훌륭한 무기가 있다 한들
여인네들이 용기를 잃은 부족은
패망을 면치 못한다.
용감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이야기일지라도 희망차다. 그들은 별꽃처럼 피어난 아이들을 보듬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세상을 밝힌다. 어떠한 시련에도 끝끝내 은밀하게 품은 소망과 의문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봉오리에선 어떤 꽃이 필까? 너희는 앞으로 어떤 꽃을 피울 거니?”
가슴 두근거리며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으로 마음이 붉게 물들어 설렌다. 아픔과 슬픔만큼 기다림과 설렘을 아는 여성으로 태어났음에, 나는 남몰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