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핏 본 겉모습만으로 나를 판단한 사람들은 교유가 깊어지면 내 첫인상이 본래 모습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바깥으로 보이기에 나는 꽤나 씩씩하고 명랑한가 보다. 에너지가 넘쳐서 주변 사람들까지 힘이 솟게 한다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건방지거나 무례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양쪽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겠지만, 사실 나의 전부보다는 일부를 보고 하는 말이다. 다른 이들도 그러하겠지만, 내게는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어둠과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매우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아이였다. 친구가 별로 없었기에 책을 벗 삼아 지내길 즐겼고, 그러다 결국 작가라는 이름으로까지 살게 되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드러내 놓고 우울함과 예민함을 과시하지 않는다. 어디서 누굴 만나더라도 기분 좋게 만나고 기분 좋게 헤어지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한때 내 좌우명은 “착하게 살자!”였다.
그러니 내가 "방콕족"이라고 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쏘다니게 생겨 가지고는 "방"에 "콕" 틀어 박혀 지내길 즐기는 성격이라는 게 의외인가 보다. 하지만 나는 내 작은 방의 책상 앞에서 꿈꾸고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러니 내게 역마살이나 방랑벽 같은 건 아예 없는 셈이다. 여행을 별로 즐기지도 않고 자주 하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무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여행 가방을 꾸리기는 하지만, 나의 여행은 언제나 내가 진저리치며 떠나고 싶어 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문호 괴테는 나와 아주 딴소리를 한다. “여행은 좋은 것이다.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도서관 서가를 왔다 갔다 하다가 특이하고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목은 <세계를 더듬다>(까치)인데 부제가 "한 맹인의 19세기 세계 여행기"이다. 19세기라면 어떤 시대인가? 그야말로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집 떠나면 개고생"인 시절이다. 도보나 말, 마차나 수레, 바람에 의해 추진되는 배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거니와 그 여행가라는 사람이 맹인이라 한다!
1786년 영국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제임스 홀먼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점자도 없고 맹인을 위한 학교도 없던 시대에 사회적 신분의 벽을 넘으려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장교의 길을 걷다가, 신참 소위의 혹독한 근무 조건 속에 결국 불치의 병을 얻고 실명한다. 당시의 맹인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것은 거지가 되거나 가족들의 짐이 되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는 천신만고 끝에 해군 기사가 되어 명문 의과대학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여행가로 변신한다. 한때 여행기가 잘 팔려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여행 욕심은 끝이 없어 결국 총 40만 킬로미터, 지구 10바퀴를 돌고야 만다. 그것도 거의 혈혈단신에 빈약한 자금만을 가지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는 이유는 호기심과 대리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홀먼의 궤적을 따라가노라면 유럽과 시베리아와 아프리카와 남미에 대한 이국적인 풍경과 정보 이상의 것을 발견한다.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맹인이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하게 답했다. “나는 내 발로 더 잘 볼 수 있답니다.” 베수비오 화산은 유황 냄새와 열기로, 로마는 손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혀로 이해했다. 도시는 건성으로 살펴보고 곧장 황야로 달려갔다. 그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백인들이 멸시하는 원주민들의 지혜를 알아"보았고",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는 것보다 더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했다. 인생이라는 여행에 충실했던 제임스 홀먼의 방명록은 항상 이러했다.
나는 지나가기를 원할 뿐, 정복을 바라지 않는다. 나를 정복하지도 말아주기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역마살과 방랑벽을 넘어 여행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은 위대한 인간을 만난 기쁨에 가볍게 전율했다. 그리하여 잠시 생각했다. 둔하고 게으른 몸이나마 일으켜, 어디로든 떠나 볼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