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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장석남 - 지극하긴 하였는가!
kklist21 | 추천 (0) | 조회 (502)

2010-05-24 00:20

실로 오래간만에 편지 써봅니다.

편지 쓰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 심부름을 하던 날들도 있었고요.
제 가형(家兄)은 당신 마음의 여자에게 부치는 편지를 심부름 시키면서 우표를 꼭 삐뚜름하게 부치라고 봉투에 우표 자리를 그려 주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 더 좋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으나 제게는 향기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보내는 사사로운 이야기도 그렇듯 좀 삐뚜름한 것이지 싶습니다. 그 점, 시를 공부하는 자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삶이 외롭다는 것을 짐작한 지 꽤 여러 해 되었습니다만 그 외로움을 이겨 나가는 한 요령에는 자기 마음을 무턱대고 보여 주는 것도 가끔 크게 우는 것만큼이나 효력이 있는 줄 압니다.
문득 연암(燕巖) 선생의 호곡장터 생각이 나네요. 울기 좋은 데를 알아차리다니!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젖습니다.
이 편지가 제 허름한 마음의 노출일 것이 문득 부끄럽습니다.

지금 제가 잠시 머물고 있는 데는 강원도 인제입니다. 강원도에 오면 다른 무엇보다 나무들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실감이 듭니다. 겨울이니 겨울 나무들입니다.
엊그제는 가까운 산보를 다녀오다가 얼핏 나뭇가지들의 기색이 좀 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아주 조그만 변화였습니다만 분명히 먼 데서 온 미소가 틀림없었습니다. 봄의 예감입니다.

동지(冬至)에 대해 생각합니다. 겨울의 지극한 지점, 하여 이제 내리막으로 향하는 거기.
주역(周易)이었던지 동지 지나면 봄으로 친다는 구절을 본 적 있습니다. 황진이의 그 절창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하는 시 또한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의미도 새삼 새겨 봅니다. 지금 우리 나이가 꼭 그 지점을 지나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나이로 치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한 꼭짓점의 안팎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 하나, 그 옛날 삐뚜름하게 붙였던 우표처럼 따라 나옵니다.
"헌데 지극하긴 하였는가?" 지극하긴 하였는가!

남녘에 먼저 오는 봄의 예감을 기대합니다.

강원도 인제에서 장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