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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kklist21 | 추천 (0) | 조회 (505)

2010-05-29 09:08

“사람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를 신용하는 것이다. 그를 신뢰하지 못할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를 불신하여 그대의 불신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H.L.스팀슨)

이 말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는 것은 바로 접니다. 사실 저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숙제를 하지 않아서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국어 받아쓰기를 하면 늘 열 문제 중 한두 개만 맞았으니까요. 그렇게 공부에 관심이 없던 제게 성적 바닥권을 탈출하는 기적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중간고사 즈음이었습니다. 늘 그렇듯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완전학습을 샀습니다. 그러곤 여전히 한두 장만 푼 뒤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었지요.

어느 밤늦은 시간, 부모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붉은 백열등 아래서 마당 한 가운데 쌓여 있는 열무를 한 단 두 단 묶고 계셨습니다. 시장에 내다 팔 열무를 정리하시는 중이었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왠지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생각났습니다. 부모님께서 일하시는 동안이라도 공부하다 자야겠다는 생각에 문제를 하나 둘 풀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 공부한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곤 2학기 중간고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두 아는 문제, 풀어본 문제만 나온 것입니다. 시험 시간만 되면 끝까지 남아서 하나라도 더 맞히려고 연필을 굴리기도 했지만 그날 문제를 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중간고사를 마친 뒤,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네 점수는 이랬는데 이번 중간고사에서는 이렇게 나왔어. 이게 네 점수 맞니? 커닝한 건 아니고?”
교단 옆에 위치한 선생님 책상 앞에서 제 성적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평균 91.5점."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 과목을 90점 맞아도 놀라울 텐데 평균이 그랬으니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갑작스런 성적 향상은 칭찬이 아닌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선생님의 의심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칭찬은커녕 의심하시는 선생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 선생님, 정말 공부했는데요. 제 주변을 보세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없잖아요. 정말이에요.”

제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갑자기 일어나셨습니다. 그러곤 저를 반 아이들을 향해 세운 뒤 양손으로 제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익겸이가 이번 중간고사에서 반 2등을 했습니다. 모두 박수로 축하해주세요.”
갑작스런 성적 향상을 의심하시는 선생님 반응에 놀랐지만, 제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줬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만약, 그때 제 자리 주변에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그 선생님이라면 아마 믿어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제 말을 그대로 믿고 더 이상 추궁하거나 커닝 흔적을 찾지 않았으니까요. 이것저것 살피고 찾다가 마지못해 "그럼 믿어주지"라는 반응이었다면 아마 제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겁니다.

신뢰란 그런 것입니다. 돌다리를 두드리듯 믿을 만한지 이리저리 찾다가 믿는 것은 신뢰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마음은 상대방도 느끼게 되지요.

신기한 것은 그날 이후 저 역시 선생님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선생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죠. 신뢰가 또 다른 신뢰를 낳은 것입니다. 제게 신뢰가 무엇이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처음 깨닫게 해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익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