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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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5 13:26
요즘 저희 아빠는 공부하시는 재미에 푹 빠지셨습니다. 제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스레 말씀하시죠. “오늘은 모의고사를 2개밖에 안 틀렸어.” 그러다가도 “나리야, 아빠가 이제 늙었나 보다. 분명히 어제 공부한 건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하하.” 라고 머리를 긁적이십니다. 그러곤 이렇게 놀 때가 아니라면서 다시 책에 눈길을 돌리시죠.
이러저러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아빠의 장래희망은 아마 교수님이었을 겁니다. 대학 3학년 때 엄마와 결혼을 하고는 대학원 진학도 하셨으니까요. 가물가물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빠가 책상에 앉아 책을 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꼬마인 제 눈에 아빠는 이 세상 누구보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퀴즈 프로그램 정답도 척척 내 놓는 아빠였거든요. 하지만 오빠와 제가 태어나고 점점 자라면서 아빠는 서둘러 취업을 하셨지요.
어릴 적 제 꿈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습니다. 선생님, 아나운서, 화학자, 라디오 작가 등 분야를 막론하고요. 소소하게는 "날씬하게 해 주세요,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로또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 같은 게 있었죠. 하지만 아빠의 꿈은 달랐습니다. "우리 아들딸 건강하게 해 주세요"였고, "나리가 원하는 아나운서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였습니다. 제가 저만의 꿈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아빠는 제 꿈을 응원해 주셨던 거죠. 아직 꿈을 펼 날이 무궁무진하다고 믿는 지금의 제 나이에, 아빠는 가족을 위해 채 펴지도 못한 꿈을 꼭 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그토록 보고 싶던 책을 맘껏 읽고 필기를 하고 학원에 다니며 숨겨둔 꿈을 슬며시 꺼내셨습니다.
돌아보니 전 아빠의 장래희망이 뭐였는지, 아빤 정말 뭐가 되고 싶었는지 물은 기억이 없습니다. 아빤 그저 "우리 아빠"였으니까요. 그에게도 꿈이 있고 장래희망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돋보기를 쓰고 공부를 하고 있을 아빠께 여쭤봐야겠습니다. 아빠의 장래희망은 뭐였냐고, 조금 늦었지만 이젠 제가 그 꿈을 응원해 드리겠다고요.
임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