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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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16:34
살면서 때로는 내게 붙은 호칭이나 직함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중 늘 쑥스러운 단어는 단연"선생님"이다. 분에 넘치게 20대 후반부터 선생이 되어 스스로 맘 졸이고 책망했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래도 제자 복은 있는지 수석 입학·졸업하는 제자
를 둬 보기도 했고, 스승으로 보람을 느끼게 해 주는 고마운 학생들도 생겼다. 열심히, 독하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 고마움은 선생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현명함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과 땅이 모두 설던 러시아 유학 시절 나의 가장 큰 은인은 누구보다 지도 교수님이셨던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선생님이다. 내가 무대를 두려워하자 선생님은 자주 연주 기회를 만들어 공포심을 없애 주었고, 늘 웃는 얼굴과 재치로 레슨 시간을 이끌며
결국 음악도 청중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그나체바 선생님은 내게 음악가로서, 미래의 선생으로서"기다림"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분이다. 중요한 작품 독주회를 앞두고 있을 때도, 레슨 시간 동안 내 연주에 대해 별말씀 없이 침묵을 지키시다 독주회가 끝난 뒤 오랫동안 기다려온 칭
찬 한마디를 가슴 깊이 새겨 주던 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은, 내 인생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학생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음악을 하는 학생들은 콩쿠르나 여러 실기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워낙 변수가 많아 오래 준비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의 기회란 부담감에 평소에 못 미친 실력이 나올 때, 학생들은 크게 낙담해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나는 그런 학생들에게 별다른 말을 않는다. 긴 위로의 말이나 따끔한 질타의 말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늘 기다림으로 바라보던 스승이 떠올라서다.“ 기다려 봐라. 잘될 거다.”나는 짤막한 이 한마디로 많은 걸 대신한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자각이기 때문이다. 음악가의 삶이 늘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야 비로소 그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을, 오랜 기다림 속에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자기가 느끼고 받아들일 때까지 말을 아끼고 지켜볼 뿐이다. 진정한 교육은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가는 것이라고, 스승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김주영 님 | 피아니스트
-《행복한동행》200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