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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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16:35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아이들은 질리도록 <풍년가>를 불렀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나만 보면 그 노래였다. 아이들뿐이었으랴. 이따금 동네 어르신, 심지어 선생님조차 나를 골려 댔다.
“아따! 참말로 징흐다잉. 인자 고만 좀 해야. 느그덜 잡히문 쥑여 뿐다.”
통사정을 하고, 악을 쓰고, 더러 으름장을 놓아도 부질없었다. 역정 내는 내 골에 무장 신이 나서 목청을 돋을 뿐이었다.
때글때글 알곡과 황금 들판이 떠오르는 이름. 태풍이 고향을 휩쓸고 간 뒤 아버지는 딸 셋에 이어 본 첫 아들의 이름을 풍년이라 했단다. 하지만 나는 풍년가에 물려 내 이름이 지긋지긋했다. 나를 보는 순간 입이 간질간질, 저절로 흥얼거려진다는 아이들도 어찌해 볼 수 없었다. 급기야 어머니는 내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용하다는 작명가가 지어 준 이름은 태연(太淵). "클 태(太)"에 항렬자인 "연못 연(淵)"을 붙였다.
“인자부터 풍년이는 엄꼬 태연이다. 느그덜부터 명심해야 쓴다. 알것제?”
애먼 누이들은 생짜 이름을 입에 붙이느라 애먹었다. 무심코 튀어나온 “풍년아”로 혼쭐이 나기도 했다. 압권은 단연 "개명 파티"였다. 어머니는 온 동네 코흘리개들을 불러 모았다. 산도, 옥꼬시, 센배, 꽈배기, 사탕, 호떡에 사이다까지. 너나없이 주리던 시절, 구한 주전부리 횡재라니.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다가 이게 웬 떡이냐 볼이 미어지도록 먹어 댔다.
“인자 풍년이 이름 바꽈 부럿다. 꼭 태연이라고 불러야 쓴다. 알것지야?” “예!”
아! 그러나 이 노릇을 어쩌랴. 양껏 배를 채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풍년이 왔네~.”하며 줄행랑을 쳤다. “오메 저놈들 좀 보소, 기껏 믹여 놨등마. 허어….” 발을 통동 구르던 어머니의 한숨과 함께 "개명 작전"은 실없는 소동으로 끝났다.
“누구시라고요?” “황풍년이요.” “황충년이요?” “아니, 풍년이라고요.” “예에, 통연이요.” “아니, 그거시 아니고 "풍년이 왔네"하는 그 풍년이요.” “아! 예에….”
나는 간혹 전화토에 대고 풍년가를 불려 준다. 그때마다 성(姓)과 절묘한 조화로 당신의 뜻을 남기고 가신 아버지와 그 이름을 지켜 준 깨복쟁이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황풍년 님 | 《전라도닷컴》편집장
-《좋은생각》200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