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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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21:26
대학 2학년 때,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첫선을 보이는 워크숍 공연으로 우리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희곡인 〈쥐덫〉을 택했다. 될성 싶은 떡잎을 가늠하는 자리였던 그 공연에서 나는 지금 생각해도 등골에 땀이 날 것만 같은 실수를 해 버린다.
폭설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 우연히 한 저택에 모이는데, 갑자기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어디선가 형사가 나타나 등장인물들을 취조하기 시작한다. "미스 케이스웰"이라는 좌익운동가 역을 맡은 나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어디서 뭘 했냐는 형사의 질문에 서재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노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연기 중이었다. 형사는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하고 나는 의심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핸드백에서 편지를 꺼내 보여 준다.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유일한 단서가 될 증거물을 보이는 장면이었기에 무대 위의 배우들은 물론이요, 소극장을 꽉 메운 관객들이 모두 내 손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가방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 편지가 없었다. 그때의 그 황당함과 절망감이란! 천만다행으로 그 가방은 여자 동기가 실제로 들고 다니던 가방이어서 그 안엔 친구가 쓰던 수첩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난 임기응변이랍시고 가방에 손을 집어넣은 채 수첩을 한 장 찢었다. 그때였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관객 하나가 "풉!"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 소리는 무대 위 멍청한 햇병아리 배우의 실수를 충분히 비웃고 있었다.
어찌됐건 나는 시대에도 안 맞는 무늬가 그려진, 찢긴 수첩 종이 한 장을 형사 역을 연기 중인 동기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동기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우에게 평생 짝사랑의 대상인 관객으로부터 엄청난 모멸감을 느낀 나의 머릿속은, 동기에게 미안함조차 느낄 수 없는 진공상태일 뿐이었다.
공연은 별 무리 없이 끝났다. 하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소중한 무대 위의 시간을 망쳐 버린 이후로 나에겐 소품 노이로제가 생겼고, 그 덕에 어느 정도 선배 소리를 듣게 되고 나서도 내 소품만큼은 매 공연 전에 반드시 스스로 챙기는 당연하고 올바른 습관을 갖게 됐다.
배우에게 가장 큰 스승은 이름 없는 관객이라던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해 준 그때 그 관객은, 오늘날 나를 있게 해 준 소중한 사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오지혜 님 | 연극인
-《행복한동행》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