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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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22:02
집에서 앞머리를 잘랐다. 덥수룩한데다 눈썹 바로 위까지 깡똥하게 잘려나간 모양새가 영 탐탁지 않았다. 물기가 말라가며 앞머리는 이마의 3분의2 지점까지 훌쩍 올라가 버렸다. 게다가 미처 잘려나가지 못한 잔머리가 생전 얄미웠던 시앗(남편의 첩) 산소의 떼처럼 솟아나는 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가 빨리 자라는 샴푸"와 "앞머리 가발" 따위를 검색해 보았지만, 허술한 모양새와 어울리지 않게 비싼 가격에 다시 절망했다. 스카프라도 뒤집어쓰고 미용실에 뛰어가 볼까도 했지만 겹겹이 층이 지고 길이마저 들쭉날쭉한 앞머리를 귀신인들 되돌려 놓을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나는 괜한 우세를 자초할 게 아니라 앞머리가 원상 복구될 때까지 외출을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머리를 잘못 자르고 후회하는 전 세계 상당수의 여자가 애용한다는 야한 상상을 수시로 하며, 다만 1㎜라도 머리가 빨리 자라나기를 염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묘한 자신감이 치솟았다. 남들이라면 반년은 걸려야 원상 복구가 가능할 머리 길이지만 이 정도의 왕성한 야한 상상력이라면 올 크리스마스쯤엔 모자나 스카프 없이도 명동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거란 삼류 정치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열 살의 나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학급 석차 상위권에 진입하리라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또 스무 살의 나는 언제든 다이어트에 돌입하기만 하면 날씬하고 매력적인 몸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서른 살의 나는 까짓 베스트셀러 누군 못 쓰겠냐며 목청을 돋웠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상위권이었던 적도 없고, 날씬하고 매력적인 몸을 가져 본 적도 없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도 못했다. 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올 크리스마스에 외출을 하려면 왁스 한 통과 실삔, 챙이 넓은 모자가 필요할 터다.
이처럼 나는 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산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들 줄도 모르고 늘 언저리에 머물며 환상 속을 헤매다 종내는 주저앉고 만다. 에두를 것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주책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주책없는 사람이라서 좋다. 비록 의지박약으로 이뤄내지 못할 꿈일망정 쉬지 않고 꿀 수 있는 이 염치가 자랑스럽다. 그래서 중위권의 성적으로, 66사이즈의 몸매로, 어중간한 앞머리로 살아가는 게 제법 마음에 든다. 세상에 꾸지 못할 꿈이란 없다. 확신 없이 복권을 사듯, 오늘도 주책없이 내일을 꿈꾸는 게 소시민의 낙이 아닐까? 아, 즐거운 인생이다.
강지영 님 | 소설가
-《행복한동행》200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