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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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3 19:12
가끔 생각한다. 내 이름이 "안착히"가 아니었다면 난 오늘날 어떤 모습일까. 과연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듯 하루에도 수차례 남의 입을 통해 내 이름을 들으면서 부모님이 원하신 대로 "착한 사람"이 되었는지 자문해 보곤 하지만, 그것은 나보다 내 주변 분들의 판단이 정확할 것이다.
어릴 때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나가 살면서 내 이름은 두 버전이 생겼다. 말레이시아의 화교학교에 다닐 때는"안싼시(安善憙)", 방글라데시에서 영국학교를 다닐 때는"ChakHee Ahn". 둘 다 현지에선 별 느낌이 없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니면서 비로소 내 이름이 화젯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을 만날 때나 강의 시간에 발표에 나서는 학생이 없을 때 난 자주 주목을 받았다. “안착히? 착하다는 건지 안 착하다는 건지 헷갈리는데, 누구지?” 교수님의 말에 백여 명의 눈들이 내게로 쏠렸다. 그럴 때마다 군중 속에 숨을 수 있는 평범한 이름이 부러웠다.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찾고 개발하기도 전에 남들 앞에 등 떠밀려 나서야 한다는 억울함에 이토록 "무모한"이름을 지어 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름의"진가"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YTN에 입사해 전파를 타면서부터였다. 한국 최초의 영어뉴스를 진행하면서 세간에 노출되고 취재 도중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흔치 않은 이름이 주는 혜택을 누렸다. 이름이 아이스브레이커가 돼서 취재원들에게 보다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가 하면, 외우기 쉬워서 날 기억해 주고 챙겨 주는 분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Jackie"같은 서양 이름을 한글로 표기한 것으로 생각하다 순수 한글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반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분들의 감탄 속에 이름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딸이 제 이름값을 잘 감당하길 바랐을 부모님의 큰뜻에 감사했다. 그저 주어진 이름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기대에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름이 어떻든 무슨 일을 하든, 누구나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자기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름값"아닐까.
안착히 님 | 아리랑TV 보도제작팀장
-《행복한동행》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