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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는 터지는 꽃망울만큼이나 학교도 매우 바쁘게 돌아갑니다. 유난히 오후 햇살 이 따뜻하고, 목련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미처 아이들과 친해질 겨를 없이 겨우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텅 빈 교실에서 남은 일 을 처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집에 간 줄 알았던 지은(가명)이가 슬며시 교실 문을 열 고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가정 실태 조사서 쓰고 가도 돼요?” “네가 쓰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니 부모님께 써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아빠는 바쁘셔서 저보고 쓰라고 할 테니까 그냥 쓰고 갈게요.” 몇 분이 흘렀을까요.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지은이가 가정 실태 조사서를 건 네주었습니다. “선생님, 뒷장에"부모님이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제가 대충 썼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지은이가 준 가정 실태 조사서 내용을 정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보호자 이름을 적으려는데"어머니"성명 칸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점 하나를 찍은 것이 보였 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지은이는 어릴 적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엄마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내내 망설였을 지은이를 생각하니 가정 실태 조사서에 함부로 점을 찍 을 수 없었습니다. 자판을 눌러 조심조심 점을 찍었지만 그 점이 왜 그리 커 보이던지 요. 사랑하는 엄마 이름 대신 찍은 콩 점 하나가 아이의 마음속에 까만 딱지로 앉았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른 글씨체를 흉내 내“우리 지은이 많이 예뻐해 주세요.”라고 쓴"부모님이 선생님 께 하고 싶은 말"부분은 나를 기어이 울리고야 말았습니다. 한동안 책상 앞에 다시 앉 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운동장에서 뛰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만 바 라본 기억이 납니다. 언제쯤이면 헤어진 엄마, 아빠가 아이들 마음속에 까만 딱지 하나 남기지 않는 세상 이 올까요? 그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수현님| 본량초등학교교사, 시인 -《좋은생각》2010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