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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행복한 동행 - 바람의 스승
kklist21 | 추천 (0) | 조회 (470)

2010-09-09 18:54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어느 봄날,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에 새로 선 시골 중학교에 한 교사가 부임해 왔다. 짙은 갈색 안경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바람의 신 같은 젊은 국어 교사였다. 그 선생님은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열네 살의 어린 소년에게 바람을 넣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도 아니고, 억만 금을 거머쥔 거부도 아니고, 천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도 아니고, 한 자루 아름다운 펜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소년의 황량한 가슴에 매일 종균을 뿌렸다. 소년은 드디어"글의 병"을 앓으며 고향을 떠났다. 읍으로, 큰 도시로, 다시 먼 서울로 떠돌며 거센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한 자루 펜을 삿대처럼 쥐고 살았다.

소년은 점점 자라 청년을 지나고 장년을 넘어 아홉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시집이 세상을 움직이기는커녕 그를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실의에 잠긴 이 늙은 소년은 어느 날 아홉 권의 시집을 들고 바람의 스승을찾아갔다.“ 도대체 이것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무슨 힘이 있단 말입니까?” 스승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산야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숲을 보아라. 저 아름드리의 거목들도 애초의 시작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그것이 수많은 계절을 견디며 거대한 수목들로 자라 지상을 저렇게 덮게 되었구나. 네가 세상에 뿌린 시(詩)의 종자들도 어느 때, 이름 모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려 말없이 자라고 있으리라.”

그리고 바람의 스승은 갔다. 막상 당신은 한 권의 시집도 지상에 남겨 놓지 않은채.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무명의 한 문학애호가로 한평생 시골에 묻혀 살다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어느 겨울밤, 온 세상이 깊은 눈 속에 묻혔을 때 바람처럼 갔다. 한 소년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의 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는….

해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이 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줄 때면 떠나가신 그 "바람의 스승" 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 내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 계신 그분을 확인하며 위로를 받는다.

임보 님 | 시인

-《행복한동행》2010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