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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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18:44
다리 위는 미끄러웠다. 이삼일 전에 내린 눈이 반질반질 얼어붙었고 하늘에서는 제법 큰 눈송이들이 내렸다. 나는 시내로 나가는 길이었고 그는 목욕탕이 있는 동네 쪽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는 길을 더듬어 가는 지팡이를 지니고 있었고 검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모습이 생소했지만 분명히 목욕탕에서 만난 그였다. 아무런 구김살 없이, 아무런 불편도 못 느낀다는 듯이 목욕을 끝내고 나서던 그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이날 빙판길을 조심조심 걸어오던 그는 내게 또 하나의 눈여겨볼 얘깃거리를 건네주었다. 그의 가슴 한쪽에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프리지어였다. 회색빛의 도시와 노란빛의 꽃다발이 싱싱하게 어울렸다.
“참 예쁜 꽃이네요.”
인사 겸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여전히 맑게 웃었다.
“집사람이 좋아해요.”
집사람? 나는 조금 놀랐던 것 같다. 그에게 집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건 해 보지 않았다. 그는 불로동다리를 건너서 목욕탕이 있는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멈춰 서서 꽃다발을 안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뒤, 작업실 창문으로 불로동다리 쪽을 바라보던 나는 또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았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 동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지팡이로 길 앞을 더듬고 오는 친구는 분명히 그였다. 한 사람은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여자였다. 검은 안경을 낀 여자는 완전히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가 집사람이 좋아해요,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조금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에게 집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집사람이 또한 앞을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둘은 길을 더듬어 목욕탕 앞길에서 왼쪽 길로 사라졌다. 달방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 그가 가슴에 안고 오던 프리지어 꽃다발이 골목길의 입구에 싱싱하게 걸려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 뒤로도 가끔 그를 보았다. 동네의 슈퍼에서 과일을 사는 모습도 보았고 중국집에서 그와 프리지어를 닮은 그의 아내가 함께 우동을 먹는 모습도 보았다. 그가 목욕을 하러 오는 날이 화요일이라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화요일 오후 두 시쯤 나는 그를 만나러 동네 목욕탕에 가곤 한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목욕을 끝내는 것을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나는 삶이란 그것을 가꿔 갈 정직하고 따뜻한 능력이 있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어떤 꽃다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움의 발견》에 실린 곽재구 님의 <그림엽서>에서
《그리움의 발견》은 한국의 대표작가 오정희 · 곽재구 · 고재종 · 이정록이 들려주는 정갈하고 신선한 언어의 에세이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