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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아침이슬처럼 꾸밈없는 삶 -가수 김민기
kklist21 | 추천 (0) | 조회 (450)

2010-09-15 18:40

"아침이슬"을 노래하는 김민기. 화려하지도 우렁차지도 않은 목소리이지만 텁텁한 그의 소리엔 영혼이 담겨져 있다.

동숭동 대학로 변의 현란한 간판들을 뒤로하고 100m쯤 골목길을 걷다보니, 붉은 벽돌건물이 푸근하게 손짓하는 소극장 "학전"에 닿았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가슴에 숨겨진 열정을 희망으로 빛내는 이들의 어루어짐이 있는 그곳에서 우리의 좋은 사람 김민기 님을 만났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로, 서글서글하고 소박한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날 노래는 있으되 드러내고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 때문에 갖게된 신비로움과 거리감들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쉽게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도 평범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에 대해 실제보다 훨씬 미화되거나 신비화된 부분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가져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더러 고생했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때 농사를 지을때도 그대로의 재미와 보람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자연인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1951년 전북 이리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사이에서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고, 직장과 학교에 나가버린 어머니와 누나, 형들을 기다리면서, 민기 소년은 땅바닥에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이후 경기중을 거쳐 경기고에 입학한 뒤부터 가요창작을 시작했고, 64년에는 서울대 미대회화과에 입학했다. 군사정권아래서 자연스레 사회의식에 눈을 뜬 그는"아침이슬"을 발표 하였으며 곧바로 요주의 인물로 당국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하여 야학, 공장생활, 농사꾼생활을 하지 않을수 없었고 1984년 초에야 서울로 올라와 다시 문화활동을 재개하였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음반과 뮤지컬로 만들었고, 한 살림운동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다리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각종 음반과 공연의 기획제작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91년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개관, 현재까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청년시절을 더듬어 보니「가수 김민기」라는 이름이 맞지 않는 것도 같다. 그의 노래들은 70년에 주로 다른 가수들을 통해 불려졌으며, 추억같이 우리를 감싸고 돈다. 인간 김민기는 확실히 열심히 자연인으로, 생활인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는 올해 3월 자신의 목소리로 4장의 음반을 펴냈다. 그간의 그의 노래가 총망라된 생애 두 번째 음반의 출반은 22년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의 노래는 일상을 과대포장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 그대로의, 자신과 주변생활을 순수하고 소박한 가사와 음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복무시절 정년퇴직하는 선임하사에게 선물한 노래이고, 노래 "상록수"는 공장생활을 할 시기에 동료들의 합동 결혼식 축가로 만든 노래이다. 장조에서 단조로 바뀌는 멜로디진행을 지닌 "작은연못"이라는 노래는 반전의식을 상징적으로 담은 시적가사로 이뤄진 노래이며, 한국가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힌 곡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아침이슬"은 대표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노래이기도 하다. 이러한 곡외에 40여곡의 노래가 실린 이번 음반은 발매된지 두달만에 16만장이나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요즘 유행할 만한 대중가요도 아니고, 랩 음악처럼 화려한 율동을 곁들여 화면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노래도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의 진실한 마음을 찾아가기에 갈수록 많은 이들의 가슴을 열게하나 보다.

“이번 음반은 지난 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펼쳐나갈 문화작업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소극장을 열면서 얻은 빚을 갚게 되었고, 계속 반응이 좋으면 소극장 운영과 다음의 작업을 위해 투자할 계획입니다. 가수활동을 재개해 대중문화의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고 말하면서 그는 늘 따르던 후배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기억해낸다. 그의 주변에는 유난히도 좋은 사람들이 많다. 시인 김지하, 국악인 김덕수, 가수 송창식, 양희은, 노영심등이 그에게 늘 성원을 보내는 이들이다. 학전소극장을 함께 꾸려가고 있는 그의 후배들도 10년 넘게 더불어 삶의 좋은 반려자들이다. 그는 후배에게 자상한 형님역할을 늘 잘하고 있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아직도 전셋집에 살고 있다. 넉넉치 못한 살림을 꾸려나가지만 그의 꿈은 크다.

“앞으로는 우리것을 최대한 살린 뮤지컬형식을 통해 나의 음악 세계를 펼쳐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외국 대중음악과 한판승부를 해 볼 작정입니다.” 그는 이에 대한 기초 작업으로 몇 편의 외국 뮤지컬 작업을 번안,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다. 작업실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강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평범한 한국인의 보습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3년 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