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 추천 (0) | 조회 (442)
2010-09-15 18:41
스스로 타고르를 닮고 싶다고 하는 안병욱 님, 그의 독자들은 이제 안병욱님의 모습을 닮고 싶어한다.
이번에 우리가 만날 이땅의 좋은 분은 철학자, 교수, 저술가, 그리고 대중강연의 연사로 이름높은 안병욱 님이다. 삼선교 네거리에서 성북동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유난히 나무가 많은 이층집 초코렛색 대문이 눈에 띈다. 개성적인 서체가 춤추듯 새겨진 목각작품들에서 눈길을 채 거두지도 못하고, 서재에 다다랗을 때, 74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투명한 눈빛의 안병욱 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면에 동서양의 갖가지 고전들과 존경하는 이들의 사진, 서예작품들로 채워진 그의 서재에는 인생의 무게만큼 그윽한 향기가 있었다.
“만남은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만남이 있지만,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명같은 진리와의 만남,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자기사명과의 만남, 이 두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이 보다 충실해지기 위해 늘 염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화를 시작한 뒤 한 시간가량 자기사색의 결정체들을 낭랑한 음성과 빛나는 언어에 실어 들려주었다. 누구나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늘 그러했다는 듯이. 그런 그의 주변에는 늘 소중한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소년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만남 춘원 이광수와의 만남, 동경 유학시절 시인 윤동주와의 만남, 무수한 옛 현인들과의 만남, 그의 글과 강연에서 인생의 깊이를 깨달은 선남선녀들과의 만남 등이 그렇다.
올해초 그의 서른 아홉번째 책이 "인생론"이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감명깊게 읽은 독자들의 편지가 이미 그의 책상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이번에 펴낸 책은 민족앞에 유언서를 쓰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극히 제한적이 집필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시작으로 내목소리, 내 사상을 완전히 펼쳐보일 작정입니다.”
평생에 자신의 키만큼 책을 쓰고 죽겠다는 안병욱 님. 이제 허리를 넘어섰다며, 늘 새로운 청년의 정열을 불태운다.
192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그는 춘원의 문장에 매료되고, 도산의 애국심에 가슴벅찬 소년시절을 거쳐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이 되었다. 유학시절 동서양의 철학, 윤리학, 문학들에 열중하면서 학자로서의 소양을 닦아나갔다. 이후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홍사단 이사 등을 지내는 틈틈이 대중강연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탁상공론의 학자가 아닌 대중의 학자이자 교사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지난 생을 되돌아 보면 그는 "일명일생. 일회전의 시합같은 인생을 살면서 마치 도박처럼, 장난처럼 살아가는 풍조는 없어져야 하며, 자기 책임과 자기계획하에 엄숙하고 성실하게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이렇듯 진지한 삶의 태도로 일관해 온 평생이었기에 요즘도 집필, 서예와 독서, 거의 하루에 한번씩 있는 강연을 통해 독자와 만남으로써 꽉찬 하루하루를 보낸다.
“독서는 위대한 인물과의 깊은 정신적 만남인데 요즘은 손쉬운 TV나 오락들로 소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깝습니다.”
한편 그의 서른 아홉권의 책들에는 오랜 독서경험과 사색의 결과들이 특유의 간결하고 깔끔한 단거리문장으로 나타난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관심에 놀라와하는 이도 있고, 한없는 깊이에 감동하는 이들도 많다. 마치 한편의 새로운 책을 접하는 착각에 빠질만큼 많은 좋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풍부한 삶의 경험들이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발간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쭸더니 “언젠가는 쓰겠지요. 지금은 저술과 강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학자는 많아도 사상가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풍토에서 온전한 나의 사상, 국민정신을 살찌울 그런 사상의 정립에 더욱 몰두하고 싶습니다.” 라고 겸손해하였다.
문득 창을 통해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한 줄기 깨끗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속에 "좋은생각"을 통해 그를 만나게 될 많은 독자들을 위해 도덕경에 나오는 “물처럼 살아가라.” 라는 말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물은 만물을 씻어주는 덕과 변화무쌍한 적응성, 그리고 쉬지않고 흐르는 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깨끗이 해줘 만물을 이롭게 살리고, 아래로 쉼없이 흐르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물에 대해 깊은 사색을 갖다보면 지극히 약해보이는 물을 통해 강렬한 인생의 메시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 타고르를 닮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독자들은 이제 안병욱 님의 모습을 닮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의 맥이 이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 감격스럽다며, 또 한통의 독자로부터 온 편지를 집어들었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3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