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 추천 (0) | 조회 (473)
2010-09-16 07:53
언어를 전파에 실어 때론 감동과 위로를, 때론 한줄기 섬광같은 깨달음을 전해주는 아나운서라는 직업. 20여년 그 길을 걸으며, 신비로움이나 거리감은 벗어던지고 우리 곁에 성큼 다가앉은 이계진 아나운서, 방송뿐 아니라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등 방송관련 저서들로도 친근한 그가 이번 달에 초대됐다.
“방송은 언어의 색실로 하늘에 아름다운 수를 놓는, 언어의 예술입니다. 그러나 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입사직후부터 메모를 해 왔는데, 모아 보니 개인생활의 기록뿐 아니라 아나운서들과 방송의 이면사가 됐습니다.”
그는 방송에 관한 무지개빛 환상은 접어두고, 실수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당시 사회상과 조변석개하는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 반성에 기초해 두 권의 책으로 엮어 놓았다.
“모든 역사는 정사뿐 아니라, 야사나 비사까지 함께 살펴야 제대로 파악된다고 생각됩니다. 방송의 역사도 마찬가지죠. 재주가 부족해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겸손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펼쳐졌다.
그는 현재까지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사랑을 주고 갈 수만 있다면", "아나운서 되기"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시청자와 아나운서 지망생들에게 웃음과 관심, 유익한 정보들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필치는 간결하고 해학적이다. 또한 풍부한 표현력과 예리한 지적 때문에 책을 접어 든 많은 이들이 단숨에 다 읽어버리고 만다.
방송과 책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이지만 자신에 대해 결코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절제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것에 대해 “저는 7남매의 장남으로, 지방공무원이셨던 아버님으로부터 겸손과 절제, 검소함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전쟁 직후 넉넉치 못한 시대상황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아르바이트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46년 강원도 원주군 호저면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누님 셋,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의 장남으로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주의력 깊은 어린시절을 지냈다. 넉넉치 못한 문화환경속에서 어머니나 선생님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누님들의 책, 묵은 신문읽기 등은 그가 아나운서의 길을 걷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특히 중학시절 한 두 집 생겨난 라디오를 통해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동경을 품게 된다. 1970년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드라마 연출에 뜻이 있었지만, 많은 형제들에 대한 책임과 생활문제 때문에 KBS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현재까지 맡아 온 프로그램중 KBS TV "가정저널", "제6공개홀", "100세 퀴즈쇼",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가 대표적이다. 지금은 SBS "출발, 서울의 아침", "나의 삶 나의 길"을 진행하며 SBS 아나운서 부장이 그의 공식직함이다.
화면을 통해 본 그의 모습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지혜로운 뒷집 아저씨 같다. 방청객이나 다수 초대자들과의 대화가 많은 프로그램에서 특히 그의 넉넉함과 재치가 돋보인다. 다양한 주제와 발언들에 적절한 이해와 관심을 보이면서도,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행자인 자신조차 우리들 중 하나가 되어 버리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주제는 더욱 풍성해진다. “제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프로그램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입니다. 동물의 습성이나 생태를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과 사회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프로그램이였죠. 동물 생태에 대한 지식습득의 차원을 넘어, 등장한 동물의 모습을 통해 주택문제, 미아문제, 경로사상, 환경보호, 의리나 모정 등의 사람사이의 문제에 대한 각성과 교훈, 풍자로 이어졌습니다.”
말과 행동이 그다지 재빨라 보이지 않는 그이지만 재치와 통찰력의 마력이 늘 따라다닌다. 그것은 늘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생각과 생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그의 삶의 자세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방송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펴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기저기 원고청탁도 많지만, 방송에 더 충실하고자 사양할 때가 많다. 방송이나 원고, 모든 곳에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자기원칙 때문이다.
그는 방송을 위해 새벽 4시경 잠자리에 일어난다. 방송일 이외의 시간에는 흘러간 영화를 감상하거나 개인적인 원고를 쓰고, 책과 신문을 펼쳐 꼼꼼히 읽어내린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대화에 소홀하지 않으며, 자녀들과 만화책을 함께 보는 시간도 가진다. 다양한 삶의 모습 속에서 생생한 몇 마디의 표현을 얻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거나, 야구장 관중석 환호속에 묻혀보기도 한다.
“가을에는 고향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집 주위에 피어난 코스모스들과 조그만 산들을 바라보며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가을에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답변이다. 가능한대로 더 좋은 글을 써서 기왕에 나온 책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만회하고 싶고, 진솔한 삶의 얘기를 흐뭇하게 펼치는 새로운 내용의 토크쇼를 진행해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위해 그는 결코 무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포용하는 열린 가슴으로 매일 새로운 새벽을 열어 젖힌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3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