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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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3 19:02
단풍이 제 색을 뽐내는 지난 해 10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는 한 화가의 그림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 뜨리고 있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칠순 할머니, 그리고 반신불수의 장애인까지 이들은 오랜 기다림에 전혀 지친 기색없이 오히려 설레임으로 가벼운 흥분 마저 느끼는 듯 했다.
이날 주인공은 한국 화단의 큰 나무, 운보 김기창 선생이었다.
"운보"라는 이름은 이제 한 개인의 이름을 넘어서서 한국 미술사의 굵은 맥을 형성시킨, 침묵의 장애를 딛고 일어 선 놀라운 의지력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생에 대한 단단한 힘과 스스로 빛을 내는 의지를 보고, 또 그 안에서 따스한 겸손을 느낀다. 그의 화폭 자체가 그가 걸어온 온갖 희노애락의 발자국임을 알기 때문이다.
1918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운보는 5살때 이미 천자문과 통감을 뗄 정도로 영특했다. 그러나 국민학교 1학년때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할머니가 다려 준 임삼탕이 오히려 해가 되어 귀가 멀고 말았다.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되었지만 한번도 할머니를 원망해 본 일은 없다.
오히려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장애에 무덤덤 했다. 그것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린애 같은 운보의 심성 탓이었다. 요즘같이 시끄러운 세상소리를 듣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더 다행이라는 털털함으로 장애인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과 마음고생을 툭툭 털어낼 수 있었다.
운보와 그림과의 만남은 1930년 17세 때의 일로 당시 그의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의 자립을 의해 목수일을 할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신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운보를 데리고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을 찾아가 아들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운보가 말도 못하고 책이며 벽에 낙서를 해대는 것에 화가의 싹을 발견한 어머니의 지혜로움이 운보에게 운명적인 길을 틔여준 것이다.
미술수업을 한 지 6개월 만에 운보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널뛰기」란 작품을 응모, 당당히 입선했다.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정상인들과 겨뤄 이긴 것이다. 큰 감격에 젖은 어머니는 운보에게 그날을 기념하여 "구름속의 보물, 하늘의 보물"이라는 뜻의 「운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이렇듯 그의 삶을 든든히 지탱해 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운보는 그 슬픔을 삭일 여유도 없이 외할머니와 일곱 동생을 부양하는 현실과 맞부딪혔다. 그 때 처음 자신의 일부였던 그림을 그만두려 하자 스승 이당선생이 "너는 반드시 예술의 길을 가야한다"고 설득했다. 헌신적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소망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때부터 닥치는대로 꽃이건 새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스케치를 해댔다.
"정상인 보다 인정 받는 장애인"이 되자는 다짐은 1937년 그림 「고담」으로 창덕궁상을 받은 이래 각종 선전에서 수상하는 것으로 조금씩 그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가 하늘의 선물이라 표현하는 아내. 우향 박래현과의 만남은 1943년에 이루어졌다.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운보를 찾아 온 우향.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잣대로 재어지는 가난과 장애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 눈물겨운 사랑으로 결혼을 했다. 우향 선생 역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운보와는 삶의 동반자를 넘어 예술적 동지였다.
우향은 운보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그것은 운보의 급한 성격을 자극해 운보의 말을 틔우기 위함이었다. 아내의 간절한 정성과 열의로 운보는 어눌하지만 조금씩 말을 했다. 지금처럼 필담이 아니더라도 능숙하게 말을 하게 된 것도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그런 아내가 죽자 운보는 어린애처럼 몇날 며칠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아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과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못해 본 것이 가슴 깊은 곳 쓰린 한이 되어….
착한 아내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장애아들에게 조금씩 나눠 주는 것으로 그는 마음을 달랬다. 지금의 「한국청각장애인 복지회」는 운보의 이런 애틋함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그의 생활은 그림 그리는 것과 농아 복지를 위한 일 두 가지가 전부였다.
운보는 이제 자연 나이 80이 되었다. 청주에서 닭, 거위들을 키우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아직 붓을 내려 놓은 것은 아니다. "화가는 모름지기 많이 그릴 것" "많이 그려야 잘 그리지"라는 그의 말처럼, 1천여의 수많은 작품이 말해 주듯 그의 영혼의 그림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일제시대 그가 일본인들과 정정당당히 겨루기 위해 그렸던 그림 몇 점이 친일이다 아니다라는 논쟁이 되기도 했지만 운보는 올해쯤 평생 그린 그림, 작품 전부를 모은「전작도록」을 통해 자신의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힐 예정이다. 예술과 인생의 평가는 후세들이 정당하게 내려 줄 것이라 믿는 운보 김기창. 그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 임이 분명하며 의지로 상징되는 정신적 등불로 이 시대를 환히 비추고 있다.
필자 : 김선경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4년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