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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조수미 님 1986년 11월 26일 잘츠부르크의 오디션장, 수많은 백인 참가자 틈에서 한 자그마한 동양여인이 무대에 오르더니 노래 두 곡을 부르고 내려왔다. 그 때 무대 뒤로 그녀를 찾아온 세기의 거장 카라얀은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이 내려준 목소리”라고 극찬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바로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인 조수미 씨이다. “그 인연으로 89년 카라얀의 마지막 음반인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 역으로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녹음했고, 그 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마술피리> 공연을 위해, 그분이 서거하기 전날까지도 같이 리허설을 했어요. 모든 면에서 적극 도와 주시고, 저를 마치 친손녀 딸처럼 아껴주셨죠.” 그녀는 카라얀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탈리아의 저널 드 퍼블릭지의 음악평론가 줄레티가 “그녀는 동양의 진주와 같이 반짝인다. 그녀는 무대에 서기 위해 태어난 존재같다”고 극찬했던 조수미. 그녀가 지리한 장마와 폭염의 7월에 한국을 찾아왔다. 그간 도이체, 그라모폰, 필립스, 데카 등 해외 주요 음반사에서 모두 12장의 음반을 녹음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국내 음반사를 통해 우리 가곡이 담긴 음반을 만들고 7월 16일, 18일, 20일 3회의 독창회를 갖기 위해 조국을 찾은 것이다. 우리 가곡을 꽃, 고향, 새, 사랑 등 주제별로 나눠 공연할 예정이라는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간혹 외국무대에서 우리 가곡을 불러 청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적이 있어요, 서정성이 풍부한 우리 가곡을 세계화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음반을 취입할 마음을 먹었죠.” 해외무대에서 노래할 때, 혹시 관중석에 한국인이 한 사람이라도 섞여 있으면 설레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그녀는 국악도 무척 즐겨 듣는다. 그녀는 무척 감정이 풍부하다. 공항 대합실에서 소설책을 보다가 책장이 젖도록 눈물을 흘려 실연당한 여자로 오인 받은 적도 있었다. 나이든 노인네가 후줄근한 옷을 입고 혼자 버스 타는 것만 봐도 질금질금 눈물이 솟는 그녀다. 작년에 5년만에 고국무대에서 독창회를 가졌을 때 관객들의 기립박수 뒤에 네 번째 앙코르 곡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면서 그녀는 뜨거워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감성과 섬세함, 깊은 사색과 열정 때문에 그녀는 감정 연기가 필요조건인 오페라 무대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그녀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런던의 코벤트가든 극장,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 등 세계 "빅5" 극장 무대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한 것은 우연이 주어진 행운이 결코 아니다. 그녀는 최근에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그녀의 유학생활, 콩쿠르 출전기, 데뷔시절, 음악가들의 교류, 각 나라를 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크고 작은 감상들이 담겨 있다. 그녀의 문장실력과 통찰력은 전문 글꾼을 능가할 정도이다. 이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는 “선화예술학교 시절 학교 문집에 수미와 저의 글이 자주 실리곤 했죠. 힘겨운 일정 속에서도 꼭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뛰어난 예술적 통찰력과 강한 의지로 그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음악의 길을 걷는 딸이 힘겨워할 때나 즐거울 때나 자상한 편지로 도움과 격려를 주었다. 조수미가 혹평으로 악명높은 유럽의 평론가들로부터 "오페라계를 휘어잡을 동양의 진주"라는 호평을 받고 그가 모든 무대에서 청중을 휘어잡은 마력을 지니는 연유에 대해 그의 스승 이경숙 교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투명하고 울림이 고른 목소리와 가슴을 저미게 하는 짙은 호소력, 그리고 조수미 특유의 강한 성취욕」을 들고 있다. 그녀는 국민학교 시절, 피아노, 성악, 가야금, 현대무용, 웅변 등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선화예중, 예고를 수석으로 입학했었다. 서울대 역시 성악과 개설 사상 최고의 실기 점수를 받고 수석합격했다. 그런 그녀가 유학을 가게 된 것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대학 입학 후 노래에 전념하지 못하고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며, 여러 가지 다른 방면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안타까워 한 스승의 권유 때문이었다. 서울대 성악과 2학년 재학중이던 188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피나는 노력과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유학간 지 2년 만인 85년부터 권위있는 국제 콩쿨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콩쿨들을 차례로 석권하면서 동양권 성악가로는 처음으로 유럽무대에 화려한 등장을 하게 되었고, 오늘날 세계 무대의 프리마돈나로 서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의 서문에 “내 인생에 잠시 머물다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스승”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무대와 음반제작이 끝나면 다시 전세계를 돌면서 빡빡한 연주 일정을 보내게 된다. 97년까지 이미 모든 일정이 잡혀있는 조수미, 지난 해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의 권위있는 <황금기러기>상을 수상해 최고의 소프라노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한 그녀는, 고국에서 펼치는 감동의 무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노래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4년 0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