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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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3 00:22
유안진 교수님
좋은 사람 100인은 "92년 8월, 9월, 2달간 본지 기자들이 일반인 43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찾아낸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분들입니다. "92년 10월호의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94년 8월호 성악인 조수미 님까지 스물세 분이 본지에 소개되었습니다.
유안진의 수필 한자락에 감동하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누가 그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글귀들 속에 배여 있는 삶의 고통과 지혜에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의 글이 삶을 얘기할 때, 우정이나 사랑을 얘기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그대로의 이야기임을 발견한다. 누구나 말하고 싶었지만 늘 망설이기만 하고 입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질뻔한 언어들과 사색을 그가 건져 올려 놓은 것이다. 그래서 한번 그 책을 들면 쉬 놓치 못하고,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두고두고 간직하려는 이들이 많다. 그것으로도 왠지 부족하면 고운 종이에 옮기고 때론 낙엽 위에 새겨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보내면서 가슴 설레기도 한다.
어떤 철학서나 인생론보다 유안진의 수필집에서 인생을 답을 구하려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글 속에 그대로 녹아버린 그의 삶 자체와 세상에 대한 몸부림, 체험적 정서를 놓치는 법이 없는 예민함에 있다.
“수필을 쓰기 시작한 건, 197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해부터였습니다. 내 삶 속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기억들과 매 순간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나는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하고, 그것들을 풀어낼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생계의 문제도 절박했습니다.”
국비 장학생이 아니였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유학길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지친 몸을 누일 곳은 서울 봉천동 산꼭대기의 17평짜리 집이였다. 겨울이면 연탄재를 깨 흩뿌려 놓아야만 출근이 가능했던 그 집에서 시댁과 친정 식구 여덟 명이 모여 살았다. "집 장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하며 출판한 것이 첫 수필집 <그대 빈손에 작은 풀꽃을>이었다. 그리고 그의 글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의 눈이 닿는 곳, 생각이 미치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진솔하고 깨끗한 언어의 향연이 벌어졌다. 현실은 고통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사색과 문학의 밑거름으로 정화돼 갔다.
그의 문학에의 동경과 재질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이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면소재지 장터마을과 그가 사는 마을이 세계의 전부였다. 엄격한 사대부 가문의 딸로 태어난 그는 높은 대청마루에 올라 앉아 사서를 읽거나 한시를 읊던 조부를 보면서 "시"라는 것에 눈을 떴다. 전통과 가문의 권위를 자랑하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것은 어린 그에게 누구도 침범치 못할 굳은 심지를 갖게 해준 반면, 불행한 성장의 시작이었다. 그의 부모와 자매들은 “낯선 외지로 나가 설움과 푸대접을 받는 액땜을 치르지 않고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문중의 결정에 따라, 대전이라는 도시에 던져졌다. 고향 마을의 조무라기 친구들과 산천이 전부인 그에게 도시 생활은 충격과 열등감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아들을 얻기 위해 밤낮없이 공을 들이거나 아버지가 첩을 맞는 갈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의 사춘기는 황폐한 몰골로 시들어 갔다.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 헌책방 순례였다. 헌책방에서 가져온, 이광수, 정비석, 박목월의 세계는 내성적인 한 소녀의 생활을 바꿔놓았다. 또 그의 일기장은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띄우는 편지로 가득 채워졌다. 글을 유일한 무기로 ㅎ 한 세상과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수많은 책과의 감동적인 만남으로 불우했던 청소년 시절을 이겨나가는 동안 촌뜨기 소녀는 어느새 서울 사대 교육학과 학생이 되었다. 전공과 문학수업을 병행한 그는 뜻하지 않던 기회에 목월 선생에게 습작품을 보이게 되었고, 1965년 현대 문학 3월호에, <달>이라는 작품이 실리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목월 선생은 “시 창작과 전공은 별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문학의 밑거름이다. 대학원에 가서 더 공부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시 이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깨고 교육심리학을 전공해, 서울대 교수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나랏돈으로 가게 된 유학은 그에게 드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한편 우리 것의 가치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는 외국의 여러 작가들이 작곡에 해부학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귀국 후, 교육학 공부, 집안의 생계부담이라는 주어진 의무들 외에 수필집도 발간하고 청탁원고도 쓰면서 지금까지 문학인의 길을 걸어왔다. 올해로 53세가 되는 동안에 <지란지교를 꿈꾸며>, <솔로에서 듀엣으로>, <영에서 하나까지>< ,느낌표를 만들며 산다> 등의 수필집으로 베스트 셀러, 스터디 셀러 작가가 되었다. 교육학자로서의 자기 사명에도 소홀함이 없어 학생을 가리키는 중간 중간 <한국의 전통 육아방식>을 비롯해 8권의 교육저술을 남겼다. 그는 또 12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세월의 족적이며, 유안진의 인생 역정에서 빚어진 체험과 사색의 기록들이다. 그것들을 위해 지난 날 “밤낮 토끼처럼 눈을 빨갛게 해 다녔다”는 유안진 님, 고통과 우울, 고독함에서 문학적 승화로 치달아온 지난 세월이 힘겨워서인지 요즘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휴식이 시간이 필요해 요즘은 되도록 많은 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안타까운 실정에 놓여 있었다. 언젠가 어떤 조사에서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의논하고 싶은 사람으로 유안진 님을 꼽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았다고 발표된 적이 있다. 젊은이들에게 말로 지혜로운 향기를 주고 있는 그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4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