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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사방 19로에 서려있는 땀
kklist21 | 추천 (0) | 조회 (398)

2010-10-03 00:25

프로 바둑기사 조훈현 님

좋은 사람 100인은 "92년 8월, 9월, 2달간 본지 기자들이 일반인 43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찾아낸 우리 나라에서는 존경받는 분들입니다. "92년 10월호의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94년 10월호 대한체육회장 김운용 님까지 스물다섯 분이 본지에 소개되었습니다.
사방 19로, 불과 3백 6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바둑판, 그러나 그 바둑판 위에서 빚어지는 경우의 수는 천문학적인 것이라고 한다. 지금껏 일류가 두어온 바둑 중 똑같은 판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무궁 무진한 바둑의 세계에서 "천하 제일의 귀재" "바둑 황제"라는 등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로 바둑기사 조훈현 9단을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기원을 찾았을 때는 마침 제 38기 국수전 제 4국이 있은 직후였다. 제자로 키운 이창호 7단과의 "사제 대결"로 세간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국수전은 그 역사로 보아 한국 바둑계의 당대 1인자를 결정짓는 타이틀로 보는 이들이 많다. 조훈현 9단은 1기 국수전이 열린 1976년부터 연속 9년간 이 국수전에서 우승자였을 뿐 아니라, 1976년 이후부터 10년간 연달아 우승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부쩍 커버린 제자 이창호와 "국수"자리를 놓고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는데, 라이벌이 되어버린 제자 이창호와의 관계를 두고 많은 추측과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이에 대해 조훈현 9단은 “제자는 스승을 이기는 것만이 참된 보답이라는 말을 선배들과 스승으로부터 무수히 들어왔었죠. 하지만 승부를 업으로 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패배한 스승의 마음은 져본 스승만이 알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굳이 그럴싸한 말로써 자신의 심경을 미화하지 않는다. 좀 차가운 듯한 인상이나 예리한 눈빛과는 달리 솔직 담백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그이다.
조훈현 9단의 심성을 잘 읽을 수 있는 한편의 일화가 있다. 제자 이창호가 자신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던 어느 시상식장에서의 일이다. “이창호는 천재다. 나도 옛날에는 천재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좌중 폭소) 어제의 천재가 오늘의 천재에게는 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창호는 오늘의 천재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내일의 천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고 조훈현 9단은 제자에게 아낌없는 충고를 보냈다. 그리고 마치 이긴 사람의 표정으로 쾌활하게 유머를 연발해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참석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제자에 대한 깊디깊은 배려였던 것이다.
뛰어난 바둑기술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늘 잔잔하고 훈훈하게 주위를 데울 줄 아는 그이기에 사람들은 망설임없이 그를 "영원한 국수", "한국 바둑의 거봉"이라 부른다.
“한 해 평균 80회 정도의 대국을 치릅니다. 흔히 어떤 대결이 가장 어렵냐는 질문을 받습니다만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든 대국이 힘들지요. 그래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나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은 이것 하나지요. 바둑, 공부, 노는 것,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조훈현 9단은 본래 길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그이지만 "최선을 다하라"는 말만은 아끼지 않는다. 찰나의 예민한 판단과 고도의 집중이 모여, 결과를 이루는 프로바둑 세계에서 몸으로 얻은 인생의 교훈이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들어 바둑에 대한 인식이 널리 확산된 편이긴 하지만 한국 바둑이 세계 바둑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나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정도는 보통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한국 바둑 기사들이 기보(바둑을 두어 나간 기록)를 연구하는 것이 최강의 바둑을 지향하는 것" 이라는 말이, 일본에서도 "한국 바둑에 대한 연구가 생존의 요체"라는 인식이 프로기사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을 정도다. 이는 현재 한국 바둑계의 4인방으로 불리는 조훈현, 서봉수 9단과 이창호 7단, 유창혁 6단이 서로 자극이 도어 가며, 한국 바둑의 수준을 높여 놓은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조훈현 9단은 한국 바둑의 자그마하던 텃밭을 잘 일구어 풍작을 보게 한 한국 바둑계의 큰 일꾼이었다. 유난히 무덥던 이번 여름만 해도 그는 일본 땅에서 열린 후지쓰배에서 우승함으로써, 국제적인 4대기전을 모두 제패한 "바둑 그랜드 슬램"의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다.
이번 여름 이후, 그 동안 다소 침체한 듯한 조훈현9단의 바둑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 ”시간이 날 때면 산을 오르는 것이 취미입니다. 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요. 이번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든 곳에 가서 실껏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만 실행될 수 있을지···”
목포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바둑을 배우게 된 그는 바둑을 배우기 위해 5살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1962년, 만 아홉 살의 나이에 프로에 입단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가 세운 최연소 프로 입단 기록은 일본, 중국을 통틀어서도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신화로 남아 있다. 그는 열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0년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이제 그의 나이 41세,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범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 평범함 뒤에는 엄청난 비범함이 숨어 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비범함 바로 그것이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4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