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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서정주 님 “좋은생각? 참 좋은 이름이군요.” 미당 서정주 선생은 이렇게 첫 말문을 열고 잠깐 사색에 잠겼다. 작년 겨울 팔순 잔치를 치룬 나이임에도 우연히 듣게 되니 아름다운 단어 하나에 대해서조차 자기만의 느낌 속으로 빠져들 줄 아는, "참 낭만적이고 순수한 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감기로 고생했고, 건강이 썩 좋지 못해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자제하고 있는 서정주 님은 "좋은 생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인터뷰 허락의 이유를 밝히신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그의 시 한 구절 정도는 읊조릴 수 있을 만큼 한국인의 정서나 문화와 밀착되어 살아온 분이고, 또 한국의 문인들 중 미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에게 좀 더 도움을 많이 주며 살지 못했구나 하는 것, 우리 민족의 일에 힘닿는 대로 내 힘을 더하지 못한 것이 제일 아쉽지요. 자기 문학에만 골몰하고 선생 노릇이나 하고 지내다 보니….” 팔십 평생 동안 열정을 다해 살아 온 선생은 아직도 인생의 숙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당 선생의 얘기는 겸손에 가깝다. 문학적 영역 뿐 아니라 사회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의 활약상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니 말이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도달할 수 있는 극치를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보여준 점이다. 미당의 시 작업은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뚜렷하게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요, 자존심이 되고 있다. 1915년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서 태어난 미당 선생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미당의 시세계는 8세 때 서당에서 배운 당시 모음집 「당음」으로부터 열렸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외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옛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명사를 통해 시세계에 눈을 뜬 미당은 10대 후반에 가서 니체와 보들레르를 만났다. “당시 서민층의 불행과 슬픔에 동참하고 그 바탕 위에 시작을 한 보들레르의 삶이 참으로 성실하게 느껴졌었죠. 나의 사회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고요.” 이 후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도 흠뻑 빠졌던 미당은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다시 동양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창작만큼이나 독서나 철학공부, 여러 가지 문학 공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미당의 문학 생활의 기초는 이미 유년기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이다. 「화사집」「귀촉도」「동천」「질마재 신화」「서으로 가는 달처럼」「산시」「늙은 떠돌이의 노래」등등 팔십 평생 미당의 곁에 남은 많은 시집들과 몇 권의 산문집, 문학앨범 등은 그의 인생을 말해 주고 있다. “시인은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이 하늘만큼 훤칠한 자기 사유, 능동적인 관찰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인생에 필요한 새로운 경지를 찾아내는 사람이죠. 일정한 철학과,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매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눈이 필요하겠지요.” 일정한 경지에 오른 노 신인의 말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시적 천재일 뿐 아니라 지난 60여 년 동안 중단 없이 문학을 통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해 온 미당 선생이기에 가능한 얘기인 것 같기도 하다. 몇 해 전에는, 그의 청년 시절영혼을 뒤흔들어 놓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공부도 더 하고, 삶에 신선함을 불어 넣기 위해 러시아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을 만큼 지칠 줄 모르고 세상을 살아온 미당 선생이다. 요즘 가장 즐거운 일로, 3년 전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받은 뒤 거동도 불편하고 기억력도 쇠잔해진 아내가 많이 회복된 일을 들었다. “노년에는 훈련을 받아야 위축되거나 찌부러지지 않아요. 원래 산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데 요즘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별 급한 일이 없으면 집 주의에 있는 관악산 수풀 사이를 아내와 함께 산책하지요.” 아내의 기억력 회복을 위해 세계 각국의 산 이름을 외우게도 한다는 서정주 님. 한국의 대 시인이기 전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올랐던 세계적인 시인이기 전에 자상한 남편으로서의 생활이 못내 즐거운 모양이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산 1천 6백 25개를 취미삼아 외워요. 아내는 지금 1백개 정도 외울 수 있죠.”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요즘은 가정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고 있는데, 민족의 기초 단위는 가정이죠. 가족간에 부모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힘을 보태주는 일이 비록 작아 보이지만 중요한 사회적, 민족적 기여지요. 그리고 젊은이들이 좀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문학이든 학문이든 어떤 일이든지 창의력과 독자적인 생각,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래 도란도란 더 많은 얘기들을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예리한 눈빛, 우람한 음성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끊임없이 시작과 사색을 계속하고 있는 마당 선생이 빚어낼 95년의 시어들을 기다리면서 아쉬운 마음을 조금 달래본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0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