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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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9:37
변호사 한승헌 님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우리시대의 의인" "자신의 본업을 가장 희생적으로 사회에 환원한 삶" 이런 멋진 말이 꼭 들어맞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한승헌 변호사 님이다.
인권변호사, 민권변호사로서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필치를 지닌 칼럼니스트, 부드러운 시인, 유머 넘치는 수필가, 출판인, 사회운동가 등으로 열심히 살아온 귀한 분을 만나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워낙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난 분과 대면한다는 긴장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발길은 벌써 그분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먼저 「좋은생각」지난 호 한 권을 보여드렸다. 내용 중에 "천국과 지옥 사이"라는 칼럼제목에 관심을 보이시더니,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천국에는 변호사가 없다는 겁니다.” 라며 웃으신다. 학처럼 깨끗한 인상, 명쾌한 논리와 더불어 적절한 유머와 풍자를 펼칠 줄 아는 멋스러움을 지닌 분이라는 걸 첫인상과 그 말 한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한승헌 변호사는 60년대 중반 이후 필화사건들을 시작으로 각종 시국사건의 변론에 앞장서 온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 또한 두 차례 옥고를 격고, 8년 동안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하는 등 결코 평탄하지 않은 이력을 소유하고 있다.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시국 사건의 변론을 맡으려는 변호사가 드물던 시절부터 지난 30년간 변호사 생활의 대부분을 양심수들과 함께 했기에 그의 이름 앞에는 용감한 변호사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닌다. 김지하 시인, 이영희 교수, 임수경 씨 등등 그의 손길을 거쳐간 사건과 피고인들도 무수히 많았다.
“내가 뭐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친분이 있다보니 자연 필화사건들을 변론하게 되었고, 차츰 일이 많아진 것이죠. 특별히 각오를 하고 할 틈도 없었어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 상황이 오히려 나를 먼저 밀고 나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한 사회의 인권이 얼마나 잘 보장되고 있느냐는 "반대하는 자들의 인권이 어떤가를 보면 된다. 찬성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인권은 침해될 염려가 없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이 간단하고 자명한 이치가 현실속에서는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변호사로서의 허명을 좇는 대신, 유죄판결이 날 것이 뻔한 시국 사건들만 도맡아 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한승헌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들과 관련을 맺으면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쳐 왔다. KNCC인권위원,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로 활약하는 동시에 한국저작권법학회, 한국출판학회 등을 이끌어 왔고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등 여러 문화단체와도 관련을 맺어오면서 직업작가나 다름없는 필력으로 2권의 시집, 여러 권의 수필집과 논설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러 신문이나 잡지들에 발표한 논문, 칼럼, 수필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그 주제도 법률, 인권, 역사, 시사적인 내용에서 저작권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했다.
요즘은 변호사 활동 외에 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저작권 심의 조정위원회, 언론중재위원회 일과 중앙대 언론대학원 강의에 많은 시간을 내고 있다 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소극적이지 않느냐는 말도 합니다만, 최소한 덜 나쁜 사람이 되자는 것이 내 삶의 계명이라면 계명입니다, 선한 삶, 의로운 삶을 가꾸도록 하겠지만 그에 못미치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것이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의 얘기에는 어떤 표현으로도 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외유내강이라는 말로 조금이나마 설명이 될까.
애써 힘주어 말하는 법 없이, 시종일관 자신이 해온 많은 일들을 겸손하게 낮춰가며 이야기 하니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934년 전북 진안군, 무주구천동 근처의 두메 산골에서 태어난 한승헌 변호사는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지으며 사는 게 꿈이었을 만큼 소박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숙부의 배려로 중학교에 진학하고,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습작시를 발표하기도 했던 그는 농부에서 교사로, 대학시절 아나운서가 되는 것으로 꿈이 바뀌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법조인이 되리라고는 그 스스로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다 지방대학 출신으로 취직이 힘들 것 같자 사법고시를 쳤고 요행히 두 번만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법조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대단한 포부를 지니고 법조계에 들어섰다는 사람조차 도달하기 어려운, 정의와 양심의 표상이 되었다. 그것은 고난의 한 세대를 살면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살아온 치열함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풍파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동시에 많았던 것 같아요. 최근 전문적인 영역이 되고 있는 저작권에 관한 분야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작권에 관한 공부는 두 번의 옥살이 중에 시작된 것이죠. 다른 책은 보기 힘드니까 그 분야의 책을 많이 보게 됐던 것이죠. 그 때 밖에 있었으면 여러 가지 활동으로 그만큼 책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 분분은 그때 나를 가둔 정권에 감사할 일이죠.”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소신껏 변론을 펼치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인권의 현주소를 물어 온 한승헌 변호사. 가까이서 본 그는 삶의 지혜와 넉넉한 웃음을 지닌, 우리 사회의 참 어른의 모습이었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