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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우리 역사를 바르게 알리는 얘기꾼
kklist21 | 추천 (0) | 조회 (436)

2010-10-07 18:42

소설가 조정래 님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백여 만! 2백자 원고지 2만 장을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소설가 조정래 님은 대하소설 「아리랑」집필을 시작하면서 붉은 펜으로 이런 글을 써붙여두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공간을 배경으로 좌우이데올로기 갈등과 그 속에서 고단한 삶을 꾸려가는 민초들의 얘기를 다뤘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이어, 한일합방 전후의 민족적 갈등을 담고 있는 「아리랑」의 집필에만 매달려 온 지 4년 8개월.
그동안 수만 장의 원고지 칸을 메우면서 그는 위궤양을 얻어 새벽마다 뒤척였고, 마비된 오른팔에 침을 꽂기도 했으며, 두 다리가 퉁퉁 부어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수없이 맞았다. "이건 인생이 아니다" 며 도망치고 싶어질 때, 작가적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마다 점점 빛바래가는 붉은 자필을 떠올리며 다시 원고지를 마주했다는 조정래 님. 그렇게 해서 광복 50주년을 맞는 감격적인 8월에 「아리랑」은 12권으로 완간되었다.
조정래 님을 만난 것은 소설「아리랑」의 원고 마지막장에 힘든 마침표를 찍은 지 며칠 지나지 않는 시기였다. 「태백산맥」에서「아리랑」까지 꼬박 10년 8개월의 세월을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에 바쳐온 그는 문단안에서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조차 지독하게 성실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글쎄요. 그걸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다 말할 수 있을까요. 작가의 길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 대담이 될까요.”
자신의 작품에 관한한 당당히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역사, 민중들의 역사를 말할 때는 마치 덕망높은 한 민족운동가가 되살아온 듯한 착각을 갖게 하는 작가 조정래 님.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는 때론 유머가 번뜩이는, 다정다감한 얘기꾼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작가 조정래 님은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학교는 광주 서중,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나왔다. 그는 어린 시전 옛날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랑방을 찾아다니면서 얘기를 듣느라 숙제를 못해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그는 사회시간을 유난히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의문투성이일 뿐이었다. 고작 유관순, 안중근 등 33인 정도가 나라를 구하려고 싸웠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의문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문학마저 정당화되는데 분노와 실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 일생을 걸기로 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70년대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친일파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자주 펼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물정 모르는 촌놈이라는 비웃음 뿐이었다. 그런 현실은 분노가 되었고 그것은 차츰 이성화, 논리화되어 마침내 소설을 써야겠다는 욕구와 열정으로 변해갔다.
“저는 「태백산맨」이나「아리랑」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어떤 필연적인 힘, 무한한 가능성을 느낍니다. 제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욕심을 떠나서, 험난한 역사를 지닌 우리들에게 아직도 올바른 역사에 대한 탐구의 욕구와 별견의 욕구가 남아있다는 증거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제겐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큰 힘이요, 채찍이 돼 왔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다 바르게 알리자는 것을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조정래 님은 그 동안 「태백산맥」「아리랑」뿐 아니라 단편 「어떤 전설」「20년을 비내리는 땅」「황토」「한, 그 그늘의 자리」중편집 「유형의 땅」장편소설 「대장경」「불놀이」등을 통해 일관된 작가의 소명의식을 불태워 왔다.
“개인으로서는 삶의 아기자기한 즐거움 모두를 희생해야 했던 시간들이지만, 이 땅에서 작가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을 무척 고맙고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병, 괴로움의 해결에 문학을 무기로 앞장설 것이며, 작가로서 공인의 삶을 뚜렷이 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아리랑」완간의 소감을 "긴 감옥살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가출옥이다" 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의 괴롭고 힘든 글 감옥살이에는 아내인 시인 김초혜 씨, 아들 김도현 씨의 격려와 뒷바라지가 컸다.
“아내는 단지 조력자의 위치가 아니라 내 문학의 감정자이자 교정자입니다. 얘기 나눌 틈도 없이 글만 쓰는 아버지를 둔 아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잘 이해해 주는 좋은 친구죠.”
4년 8개월 동안 2만 장의 원고를 끼고 달려온 긴장된 시간들. 이젠 정말 푹 쉬고 싶지만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각종 강연회 초청, 인터뷰, 독자와의 만남 등 외부활동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내 문학의 중반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문학청년이 된 기분으로 문학공부를 치열하게 해볼 생각입니다. 여행도 많이 하고, 이미 읽었던 고전들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무엇보다 내 문학세계를 조용히 점검해 보고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고 싶어요. 다음 작품도 구상해야겠죠.”
끝없이 풀무질을 해대는 대장꾼처럼 작가로서의 삶을 한시도 잊지 않는 조정래 님.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떠오르는 것들은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말 맛이 톡톡 터지는 그의 소설 구절 구절들이었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