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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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18:43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정치인이나 행정관료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꽤 오래 전의 일이긴 하지만 잠롱 방콕 시장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또 "판관 포청천"이라는 드라마가 오래도록 인기를 끈 것도 청렴결백한 공직자의 활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바램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바램에 불과하던 그 생각들에 무게를 얹어도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 서울에서 탄생한 조순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미처 축하의 인사를 주고 받을 겨를도 없이 사고현장으로 내달려야 했고 어느 정도 사고 수습이 이루어지자 이번엔 산더미처럼 쌓인 서울시의 문제들을 하나 둘 풀어내야 하는데 온 시간을 바치고 있는 조순 시장. 그래서 좀체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조순 시장이다. 그러나 그분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 출근 시간대 붐비는 지하철 안이 바로 그곳이다.
조순 시장은 출퇴근뿐 아니라 멀리서 행사나 약속이 있으면 거의 지하철을 이용한다. 의례적인 민정 시찰용, 이미지 작전이 아니라 시간절약과 시민들과 좀더 자주 접해보려는 생각에서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더 안전하게 관리해야겠다거나, 더운 역사를 지날 때면 냉방 장치를 완벽하게 해서 시민들에게 좀더 쾌적한 환경을 마련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조순 시장이 취임한 이래 달라진 시청 이곳저곳의 풍경은 늘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한번은 시청 구내식당에서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식사를 마친 조순 시장이 자신이 먹던 식판을 직접 들고 가서 반환한 것이다. 평소 집에서 식사준비를 거든다든지 식후에 차를 손수 내오는 등의 행동이 몸에 익은 시장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청 안에서는 처음 벌어지는 광경이라 다들 어리둥절했다. 이에 간부급 공무원들도 식판을 들고 반환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어다고 한다.
최근에 확대 간부회의에서 조순 시장은 각실 국장들에게 자신들의 담당업무를 시민들에게 자세히 알리는 책을 한 권씩 쓰라는 이색 주문을 해, 또 한번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서울시 간부들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구하는 자세로 업무에 임하라는 조순 시장의 깊은 뜻이 담긴 지시였다.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한 것과는 달리 시정 내용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려고 합니다. 먼훗날까지 내다보고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문화의 꽃이 피는 국제적인 도시로 가꾸어 나가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조순 시장의 말에는 성실함이 실려 있다.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바탕에 깔고 그를 대하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시장실에는 애정과 격려가 담긴 편지들이 전국에서 엄청나게 밀려들고 있다고 한다. 조순 시장은 그 주에서도 특히 "조순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민주당을 버리고 오로지 시민을 위해서 일해 주세요"라는 한 시민의 편지가 늘 마음속에 남는다고 말했다.
조순 시장은 1928년 강원도 명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함을 자랑하면서 자랐던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6·25때 육군 통역 장교를 거쳐 육사 영어 교수가 되었다. 57년에는 한국의 케인즈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0년만에 귀국해 만 40세에 서울대 상대 교수가 되었다.
그 이후 유명한 저서인 「경제학 원론」「한국 경제의 현실과 진로」「아시아의 근대화」등 많은 저술과 강의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조순 학파까지 태동시킨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선친 또한 강릉·명주지방에서 이름높은 유학자였다.
서울대 초대 사회과학대학장, 국제경제학 회장 등을 지냈으며 88년부터 90년대까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92년부터 한국은행 총재직을 맡다가 한은독립 문제 등에 대한 의견차이로 물러 앉기도 했다. 그 뒤에는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맡아 계속 강단에 섰다. 이번 시장 선거기간 중에도 시험문제를 제출할 정도로 그는 "평생학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살아왔다.
조순 시장의 이런 이력은 소신있고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고, 이번에 높은 지지율로 서울 시장에 당선되는 데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조순 시장의 거짓없고, 꾸밈없는 말과 행동에서 무한한 신뢰를 느낀다.
“능력도 안 되면서 당장 80점을 받으려면 뭔가 부정행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60점을 받더라도 다음 시장이나 그 다음시장이 70점,80점을 받을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겠습니다.”
그는 결코 과장해서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취임 후, 밤 11시 전에 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는 조순 시장에게 남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집안일을 절대 걱정하지 않도록 세심히 내조하는 부인 김남희 여사(64세)와 아들 사형제, 손자 다섯은 언제나 큰 힘이 되어준다.
매일 바쁜 일정으로 강행군하지만 타고난 건강과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젊은이들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한다는 조순 시장.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원칙에 충실하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정을 펴 각종 문제들을 치유해 가겠다"는 조순 시장의 소신이 널리 펼쳐지기를 소망해 본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