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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정상의 자리에서 새로운 꿈을 꿉니다.
kklist21 | 추천 (0) | 조회 (438)

2010-10-07 18:44

성악가 오현명 님

지난 4월 13일 자신의 노래 인생 50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끝난 자리에서 성악가 오현명은 그 감회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그냥 내 살아온 날들을 한번쯤 되짚고 넘어 가야겠다 싶어서 열었던 음악회였는데, 그 두 시간 동안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것이 내 꿈, 내 삶이 구나 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깊이 와 닿았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자유롭게 내 노래를 부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제 황혼에 들어선 초로의 신사는 꿈을 이야기했다. 어린아이들이 가진 맑은 꿈, 청년들이 지니는 파란 빛깔의 꿈은 어른이 되면서 사그라져 대부분은 "난 꿈을 잃어 버렸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입에선 분명 꿈이란 단어가 올려졌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꿈은 오랫동안 한길만을 걸어온 사람이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서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의욕적인 꿈이다. 안경너머로 차분하지만 유난히 말은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5년전인, 90년 2월 25년동안 몸담았던 한양대 음대에서 정년퇴임한 후 그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청하는 곳이면 그것이 그 어디이건 달려가 노래를 사이에 두고 청중들과 만났다.
조그만 읍민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고, 여학교 강당에서 초청 독창회도 가졌으며, 시골 읍내의 교회에서도 노래했다. 농사일에 지쳐 "우리같은 사람들이 뭘"하며 문화적인 생활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최고의 청중들이며, 내 노래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런 마음자세가 70이 넘은 지금도 굴절되지 않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
도랑이 넓고, 느긋한 그의 성품은 아마도 고향인 만주의 영향이 아니가 싶다. 잡화상을 경여했던 아버지와, 교회생활을 열심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집에선 언제나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다. 하지만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원래 저는 그림을 그렸지요. 지금도 틈이 나면 붓을 잡습니다만…. 김훈이라고 현재 화가로 활동하는 친구가 제일 친했던 단짝이었는데, 우리 둘이서 약속을 했지요. 나는 그림을 잘 그리니깐 화가, 훈이는 노래를 잘하니까 성악가가 되자고요. 그런데 훈이가 차에 치어서 얼굴 반쪽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병을 갔던 나에게 훈이는 "내 얼굴은 험하게 되어서 무대에 설수 없으니 네가 성악을 해라. 내가 그림을 그릴게"하더군요. 이 일로 내 운명이 뒤바뀐 것이지요."
이후 당시 5년제이던 봉천동광중학을 거쳐 고려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다 늦은 나이에 경성 음악대학(서울 음대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만난 김형로 선생님에게 20%의 재질과 80%의 노력만이 사람을 바로 세운다는 진리를 배웠고, 그 말씀이 평생의 모토가 되었다.
48년 서울 음대를 졸업한 그는 서울 공고, 선린 상고의 음악교사로 잠시 있다가 서울 예고를 거쳐 서울대에서 제자를 길러냈고, 한양대에서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였던 "춘희(1948년)"에서 하인장 도메스코 역을 맡아 "저녁 준비됐소!" 이 한마디의 대사로 한국 오페라의 출범에 동참했던 그때 이후 우리나라 오페라와 가곡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오현명.
그가 50년 동안의 삶을 가만가만 되돌아보며 제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새 젊은이들 참 쉽게 넘어지고 무릎 조금 까졌다고 엄살떨며 일어나질 못하지요. 무릎의 상처쯤이야 가법게 넘길 줄 아는 무던함도 필요하고, 아물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참을 성도 필요한 것이 세상입니다. 아무리 작은 자리이건, 성에 안 차는 때가 있다고 해도 무던하게 참으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의 힘을 길러 간다면 50년 후에 뭔가 그 세월을 종합할 만한 그릇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말은 굳이 음악하는 사람뿐 아니라 한번쯤 누구나 귀담아 들 말이다.
그는 또한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또 하나의 든든한 후원자로 아내, 김성남 여사를 잊지 않고 말한다. 서울 음대 후배였던 아내가 해주었던 여러가지 조언은 그가 방향키를 돌려야 할 때마다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아들, 며느리, 아내까지 포함해 모두 여섯명이 성악을 할 만큼 그의 가족들은 음악을 사랑한다. 이들 가족이야말로 오현명선생을 보며 나는 "복"이란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긍정적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주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했다.
"내일은 정읍으로 새로운 청중을 찾아갑니다."
그 공연 뿐 아니라 연말까지 30회에 다다르는 공연일정을 잡아 놓고 있는 백발의 성악가 오현명, 앞으로도 오랜 나날동안 그것이 큰 무대이건 작은 무대건 간에 걸죽한 소리로 "명태"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필자 : 김하늬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