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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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8 20:07
마라톤 선수 황영조 님
걷기조차 힘든 42,196km의 거리를 땀과 눈물로 채우며 달려온 사나이, 황영조. 힘들었던 지난 일들, 슬프고 안타까운 세상사연들을 말끔히 털어내고 싶어지는 한 해의 끝에 서서, 문득 그가 떠올랐다.
흔히 마라톤이 인생에 비유되기 때문일까.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힘찬 내일을 향해 뛰어야 하는 시점에서 황영조 선수와의 만남은 의미있는 일인듯 싶었다. 청년 황영조 순박한 얼굴에 야무진 눈매를 가진 그가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해온 스포츠, 마라톤으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것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였다.
당시 그가 만들어낸 온 국민적 환호성, 인간승리의 드라마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가슴을 꽉 채워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황영조 선수는 다시히로시마 아시안계임에서 우승함으로써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랑스런 한국의 영웅으로 사람들 가슴에 자리잡았다. 2만여 원폭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에 태극기를 펄럭이면서….
황영조 선수 개인적으로도 92년 올림픽 이후 호되게 치룬 유명세와 발바닥 수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승리였기 때문에 더욱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 국민이 황영조 선수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가 온 세계에 한국의 이름을 드높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지닌 부담없는 평범함, 순박함, 진실함, 그리고 애국심…. 그래서 황영조 선수는 우리들에게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고, 젊지만 의젓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선 출전할 대회가 결정되면 준비를 철저히 하는 편입니다. 준비보다 더 좋은 우승 비결은 없기 때문이죠. 훈려부터 시작하여 사생활까지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경기를 1주일 정도 앞두고는 아무도 안 만나고, 오로지 코스에 맞는 지형을 택해 훈련을 합니다."
황영조 선수는 짧은 순간 승리, 환호라는 단어를 만나고 다시 길고 긴 자신과의 싸움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마 그의 순박한 얼굴 위로 스치는, 오직 한 길을 걷는 사람 특유의 투혼을 느낄뿐.
오랜 기다림 끝에 황영조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추천마라톤대회 직후의 일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2위에 입상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열성적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우승의 그날까지 또 다시 최선을 다해 뛰겠습니다."
그러나 황영조 선수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런 말 한마디로 다시 그에게 희망을 가져본다.
알려진 대로 황영조 선수는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평범한 어촌에서 어업을 하는 부모님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는 온 종일 바닷가에 앉아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 물질을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기도 하고 고향 앞바다에서 친구들과 자맥질을 하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근덕중학교에 들어가 사이클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그는 운동을 시작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탓에 연습용 자전거를 밤늦도록 못살게 굴면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 진학해 그제서야 육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고2시절인 88년 경부역전서 신인상을 받으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던 황영조 선수는, 그후 명승부사 정봉수 감독에 이끌려 90년 2월 코오롱에 입사했다. 그리고 2년 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 마라톤계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른 성장을 보여 온 황영조 선수에 대해 남달리 타고난 심폐기능 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강인한 체력과 좋은 체격 요건을 타고 났다고 모두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황영조 선수에게는 거센 바닷바람에 단련된 강한 정신력이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육상훈련을 견뎌내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매순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2시간 이상을 외롭게 달리는 마라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달릴까.
"출발 총성이 울린 후부터 골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오로지 한가지만 생각해요. 어떻게게 가장 머저 도달할 수 있을까. 30km 지점까지는 라이벌들의 발걸음부터 표정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앞으로 펼칠 레이스를 머리속으로 그립니다. 30~50km지점에서 막판 스퍼트를 해독주가 되면 그때 비로소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92년 올림픽 때는 어머니 얼굴이 아시안게임 때는 달리는 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국민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올라오는 꾸밈없는 애국심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 그를 보는 사람들 또한 절도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가 이미 여러가지 여론조사에서 "좋은 한국인"으로 뽑힌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황영조 선수는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자격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세상도 잘 모릅니다. 다만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라는 채찍으로 알겠습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지금 당장 황영조 선수에게 가장 큰 목표는 96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그 후에는 마라톤을 중심으로 한 스포츠를 공부하여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지금까지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더 나은 자신을 꿈꾸는 청년 황영조. 앞으로도 그는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의 시간들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인내와 땀의 의미가 퇴색해버린 우리 시대의 참 삶의 의미를 던져 준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