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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한국이 낳은 마에스트로
kklist21 | 추천 (0) | 조회 (446)

2010-10-08 20:08

지휘자 정명훈 님

한국이 않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그는 현존하는 세계 5대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나날이 화려한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세계적인 음악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가 걸어온 음악인생을 통해 한국인 특유의 투지를 발견하고 평범하고 친근한 그의 얼굴에서 극히 한국적인 향취를 느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정명훈" 이라는 이름 석자는 가슴 밑부터 차올라오는 뿌듯함으로 항상 우리 가슴을 적신다.
서울 시립교향악단 초청 "송년음악회"를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났다.
“특히 마흔 살이 넘으면서 내가 배우고 받은 만큼 이웃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난 8월에 열린 "해방 50주년 축전음악회"에 참가하면서 21세기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음악이든지 학술이든지 간에 인간적인 나라를 향한 노력의 일환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이제 음악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사회적 목적에 맞춰 활용할 때가 왔고, 그것은 이 시대 예술가의 당연한 책무라고 말한다.
지난해 5월에 그는 "환경뮤지컬"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음반 취입, 지휘활동 등으로 늘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가 우리 사회를 위해 뜻 깊은 일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훈훈한 이야기로 남았다.
정트리오의 일원으로 유엔 마약퇴치 친선 대사로도 활약하고 있는 그가 음악만큼이나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도 컸다.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 고국에 돌아올 때마다 점점 더 오염돼가는 조국의 고향산천이 마음에 걸려 십여 년 전부터 염두에 두었는데 그 첫 발걸음을 떼게 된 셈입니다.”
그를 만나보면 정부가 주는 문화부분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나 "21세기를 이끌어갈 문화계 인물"을 뽑았을 때 단연 1위로 그가 뽑힌 것이나 유네스코 서울 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특히 지난해 바스티유 사건을 겪으면서 조국에 대한 생각이 더 절실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마음에 새기는데 큰 힘으로 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을 사임해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가슴아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단체 "음악의 승리"로부터 94 최고 음악가상" 등 3개의 상을 수상하면서 그 자신의 음악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다. 프랑스 청중들은 여전히 "마에스트로 정"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대가에게만 붙인다는 마에스트로라는 존칭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쳤다.
정명훈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는 피아노를 좋아해 스스로 피아노 위에 올라앉아서 놀곤 했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롬비아 매니지먼트에 소속될 만큼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소지가 보이고, 피아니스트로도 국제거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지휘자가 되었다.
언젠가 일본공연 후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다섯 개의 지휘봉을 보면서 훗날 지휘자의 꿈을 키운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베를린, 뮌헨 필하모닉, 파리 오케스트라 등과 정기연주회를 갖고 뉴욕 필하모닉과 보스톤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는 등 수많은 활동을 펼치면서 음악적 천재로 늘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이 된 뒤 90년 3월 개관 기념작으로 베를리오즈의 "트로이의 사람들"을 지휘해, 세계 음악계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미 작고한 프랑스의 신화적인 작곡가 메시앙은 정명훈을 서슴없이 "천재"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한 작품을 남겼다. 지금도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그칠 줄 모른다.
수많은 무명의 팬들이 보내는 보이지 않는 찬사까지 합친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예술가인가. 그것은 어머니 이원숙 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타고난 음악성을 뒷받침하는 그의 끈질긴 노력에 내리는 하늘의 선물이다.
그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악보를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음악에 몰두해 산다. 그래서 아무리 긴 대곡이라도 모든 악보를 외워서 연주할 만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천재성보다 더 빛나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점이 아닐까.
쉼 없이 한 길을 열심히 걷는 사람은 금세 드넓은 바다를 만나게 되나보다. 그에게 참으로 인간적이고 넉넉한 느낌이 있다.
“언젠가 농부를 만난 일이 있는데, "저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전부터 카라얀을 좋아했죠. 그런데 음악회가 통 비싸서 가질 못했어요"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젠 내가 그런 책임을 맡을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래식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들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가 적은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는 늘 화려한 무대위에 살면서도 결코 화려함에 빠지지 않아서 더욱 친밀감이 든다. 전, 선, 민 세 아들에게 한국을 알려주기 위해 애쓰는 자상한 아버지로서 그의 모습도 너무나 보기 좋다.
그처럼 뛰어난 음악가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 그처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좋은 사람의 조국이 한국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