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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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9 12:07
민주당 최고위원 이부영 님
서너 달 전만 해도 민주당 최고위원 이부영은 각 일간지와 시사지들이 앞을 다투어 국정감사를 가장 잘한 의원, 의정활동을 잘 해온 의원으로 꼽는 그런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 해 11월에 국가보안법 등 위반사건 파기환송심의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것은 그리 좋지 않는 시점이어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지역구 주민 1만5천여 명이 사면복권을 촉구하는 서명을 한 것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국회의원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길 희망하고 있지만 앞일은 알 수가 없다.
“그리 낙관적으로 생각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안 된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이부영 위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아직도 무시무시한 죄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지만, 외국에서는 한국의 인권 향상에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의 소리도 높다는데….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순교자로 자처하면서 애써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지난 날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그리고 적치를 시작한 뒤 겪어야 했던 온갖 어려움들에 비한다면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닐 것입니다.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저를 지켜준 것은 오직 진실에 대한 믿음 하나였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한, 정치개혁의 새 시대를 향한 저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뒤에서 정치개혁의 밀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이곳 의사당을 떠납니다.….”
그는 국회의사당을 떠나던 날 남긴 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화면이나 지면에서 본 것보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누구나 쉽게 호감을 갖고, 거기에 올곧은 사람을 만나는 신선감까지 덤으로 얻는 기분에 사로잡히는가 보다.
이부영 위원은 194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가 나고 자란 곳은 당시만 해도 번화한 곳이 아니어서 직접 밭농사도 지어볼 만큼 농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는 공과대학에 가서 농기구 개량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런데 4.19의거 때 절친했던 한 친구가 죽었다. 그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게 되지만 대학 4학년 때 동아일보 기자시험에 합격해 또 한번 길이 바뀐다. 하지만 7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그와 관련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청장년의 황금기를 5번에 걸쳐 7년가량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야인사가 되었다.
92년에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도정치권으로 뛰어들면서 부르짖던 개혁정치를 지금까지 변함없이 밀고 나가면서 깨끗한 정치인,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아왔다. 그러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에도 15년째 살고 있는 18평 아파트와 얼마 되지 않는 사무실 보증금이 전 재산인 깨끗한 정치인으로 살았다.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지만, 깨끗한 정치를 실천하는 풍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면에서는 뿌듯합니다.”
그에게 또 함께 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93년에 창립된 그의 후원회는 1년 만에 약 840명의 회원들이 참여했고,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가기를 원한다. 그것도 이름뿐인 후원회가 아니라 변호사 후원회원들은 월요민원 상담실을 운영하고, 사회활동도 하며, 각 분야별로 직장인 모임까지 꾸리는 등 알차게 운영되고 있다.
“보통 귀가시간이 11시에서 12시 사이라 개인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예요.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쯤은 가족들과 함께 저녁 할 기회를 일부러 만들기도 하니까 영 빵점 가장은 아니겠죠?”
부인 손수향 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자녀들도 어느덧 모두 대학생이 됐다.
“아이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자랐어요. 아내도 물론이고요. 하지만 한번도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번은 아이들과 전주교도소로 면회를 왔는데, 아들애가 머리를 빡빡 깎은 아버지를 보고 불쑥 형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마 애들에게 아버지가 외국에 갔다고 했나봐요. 그때 아내도 눈물을 보였고, 저도 가슴이 미어졌죠.”
그 뒤로도 연일 구속되고 연행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자식들이지만 다행히 밝고 건강하게 자라준 것이 더 없이 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지금까지 해온 통일 외무 분야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문제와 특히 그 속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어려움에 대하여 힘 닿는 데까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보겠다고 한다.
“세대교체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저는 정치를 비롯한 한국의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일어나고 있는 기성의 잘못된 질서, 그로 인한 지체를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통일과 국제화로 나가는 21세기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 이상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의 사리사욕에 다수 사람들의 삶이 황폐화되는 결과는 없어야겠지요.”
그의 얘기는 늘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는 장준하선생의 말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는 얘기와도 통한다.
앞으로 우리가 나가야 할 미래와 희망을 보면서, 뒤돌아서서 현재를 분석하고 고칠 것은 고치며 언제까지나 힘차게 살고자 하는 사람, 이부영. 그래서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열심히 삽시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