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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한을 춤사위로 풀고 웃음과 눈물을 나무며 사는 사람
kklist21 | 추천 (0) | 조회 (456)

2010-10-09 12:08

1인 창무극의 명인 공옥진 님

살포시 살풀이를 출 땐 끝을 알 수 없는 한의 몸짓에 가슴 찡하다. 그러나 이내 일그러진 표정과 걸쭉한 입담을 긑들인 춤사위가 이어지고 시원스레 웃음이 터진다. 이윽고 속곳까지 걷어 붙이고 맨발로 동물춤을 추어대면 우리네 어머니처럼 앙상한 그의 다리도 드러난다.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슨 마법인 양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갖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집으로 일터로 돌아가는 발걸음마다 시원스레 기를 펴게 해주는 사람. 공옥진. 하지만 무대밖에서 만난 그에게선 촉촉히 봄비 내리는 날 얄궂게 풀썩거리는 쓸쓸한 향기같은 외로움이 먼저 풍겨져 온다.
"건강요? 그만해요."
지난 1월에 있었던 모처럼의 서울 장기공연 무렵엔 지난해 가을에 받은 담석증 수술로 당기는 배를 복대로 감싸고 무대에 나서면서 극장관계자들에게 "나 죽으면 너희들이 상여 앞에서 소리도 하고 춤도 추어 달라"고 했던 그였다.
요즘 들어 "그만하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진 공연 대문인지 고단한 모습이다.
최근에 그는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가 고향 근처인 전남 영광에 차린 영광예술연구소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예전에 비해 되도록 많은 공연을 자제해 왔다. 그래서 자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 1월 공연을 계기로 제주, 대구 등 각 지방까지 공옥진 바람이 이어지더니 어느새 다시 서울로 초청받아왔다.
임시 숙소로 갔을 때 그는 여독을 채 풀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육문화회관에서 있을 저녁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머리로 귀까지 덮어서 얌전히 빗어넘긴 쪽머리. 질그릇처럼 소탈한 얼굴. 그 위로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졌다.
공옥진은 1931년 광주에서 판소리의 명창 공대일 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징용을 막기 위해 5백원에 팔려가야 했던 어린시절은 유랑극단 생활과 일본으로 건너가 춤을 배우면서 고생하는 생활로 이러졌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열일곱이 되던 해부터 여러 명창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놀림거리가 되었던 벙어리 남동생과 17세에 한스런 세상에서 눈을 감았던 꼽추 조카, 낳은 지 3개월 망네 잃은 첫아들과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그의 삶은 굽이굽이 곡절도 많았다.
한때 승려가 되어 참선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함꼐 녹여내 우리의 신명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춤의 세계를 일궈내었다.
78년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중앙대 정병호 교수의 권유로 서울 "공간사랑"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징허고 폭폭한" 자신의 인생 역정과 세상에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몸짓과 표정, 소리에 녹여 무대에 올렸다.
이제 한국춤을 얘기할 때면 공옥진의 창무극을 빼놓지 않을 만큼 국내외에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의 예술론이나 삶의 자세는 한결 같다.
"한을 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한도 풀어줄 수 없어요. 설운 사람들의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자면 머리끝에서 말끝까지 혼이 내려야 해요."
그는 공연해서 모은 돈의 대부분을 장애인과 불우한 청소년, 어린 가장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왔다.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살림살이는 늘 가난하다. 남 주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얼마나 계산이 없었던지 어느 해 봄엔 수술비가 없더란다. 그래도 자신의 선행을 결코 표내는 법이 없고, 자꾸 물으면 마지 못해 대답할 뿐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울 때가 언제일 것 같소. 무대 위에서 갈채를 받을 때가 아니요. 고생으로 번 돈을 ㅈ애인들한테 나눠줄 때요. 그럴 때면 오장이 다 흐뭇허요."
요즘 TV에 방영되고 있는 시회전화광고 "어머니와 딸" 편의 출연료도 받자마자 선뜻 불우이웃돕기에 내놓아 두고두고 훈훈한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돈이나 명예보다도 공연에 모이는 사람들, 함께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다정한 이웃들에게 자신의 춤을 보여주면서 세상 누구보다도 부자로 사는 사람 공옥진. 그는 그렇게 평생을 맑고 넉넉한 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춤이 병신춤으로 알려져 한때 장애인들이 화를 많이 냈었소. 하지만 내 춤은 익살과 해학이 담긴 나의 넋두리요. 또 그 속에는 모질게도 굴곡지며 살아오는 동안 쌓인 나의 한이 절절이 녹아있는 것이죠. 다 썩어 문드러진 내 오장육부가 그 춤에 있는 거요."
그는 자신의 춤을 병신춤이라고 하는 것을 제일 듣기 싫어한다. 그래서 해학춤 혹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배내짓이라 하면서 "무대에 서는 것이 인간문화재 소리를 듣는 것보다, 천만금을 버는 것보다도 더 좋다. 무대에서 열심히 춤추다 죽게 된다면 여한이 없다" 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크고 작은 춤판을 가리지 않고 의미있는 무대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마다않는 그는 영락없이 하늘에서 내린 춤꾼이다.
"난 어디든지 갈라요. 내 춤을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갈라요."
그는 다시 공연을 위해 분장을 서둘렀다. 그의 마음은 벌써 무대로 달려가고 있는지 양볼이 붉게 상기 되었다.

필자 : 조선혜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