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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우리 앞에 놓인 아픔들과 더불어 노래하는 가수
kklist21 | 추천 (0) | 조회 (486)

2010-10-10 00:42

가수 정태춘 님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시인의 마을" "촛불" "떠나가는 배" 등을 지어 불렀던 사람, 정태춘.
언제부턴가 화려한 무대나 스위치만 누르면 튀어 나오는 TV 화면 속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땀흘리며 일하는 데도 억울한 일만 생기고 그래서 가슴마다 풀어내지 못한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 세상의 정의를 얘기하는 사람들···. 그는 이들과 함께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대학의 학생회관으로 발길을 옮기면서도 의외라는 느낌은 없었다. "음유 시인", "서정 가수"라는 울타리를 깨고, 사회 현실을 노래하는 가수 겸 작곡가로 변신한 그의 모습이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때문일까.
언제부터라고 꼭 꼬집어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80년대 초중반쯤부터이지 싶다. 그는 전혀 다른 노래를 부르며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이 아릿하도록 훑는 노래들만 부르면서···.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벌러 파출부 나가고 ··· 더 이상 갖고 놀게 없어서 성냥불을 켰다가 훨훨···” 이렇게 시작되는 "우리들의 죽음"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부모가 돈벌러 나간 사이에 화재로 불에 타 죽은 빈민아동을 추모하면서 만든 노래였다.
각종 집회나 행사장, 시위 현장에서 민중 가요를 부르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시인의 마을"도, "북한강"도 노래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렸다.
“예전에 불렀던 노래 속에는 무욕의 땅으로 떠나고 시인의 마을로 떠나고, 어디론가 자꾸 떠납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현실이 변화되지 않는 한 완벽한 탈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렇게 말머리를 꺼낸 그는 자신의 노래를 거침없이 평한다. 사춘기적이고 운명론적인데 머물러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하고. 그 한계를 차고 나와서 우리 사회에 실제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노래하다 보니 예술인으로서 바람직한 성숙을 이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1954년에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때부터 엿보인 음악적인 재능은 정식 코스를 밟아가는 대신, 개똥철학이 휩싸인 사춘기를 거쳐 결국 대중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78년에 첫 음반 "시인의 마을"을 세상에 내놓아 서정 가수의 대명사로 인기를 모았지만 음악적인 것에서 시작된 삶의 고민끝에 운동가수로 변모했다.
“제가 예전의 음악 세계를 계속 지켜왔다면 철학자는 되었겠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노래하는 사람은 못 되었겠지요.”
그는 직설적인 폭로나 풍자, 사회 고발을 담은 노래에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아픔이나 고통에 대한 연민의 노래 속에도 서정이 깃들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문화의 폭이 더 넓어지고 사회속에서 이질화된 것을 극복하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에 그가 풀어내는 얘기들 속에는 "내 노래는 어떠해야 하나", "진정한 서정이란 무엇인가"하는 치열한 작가적인 고민이 묻어 있다.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80년대는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가장 강력하게 튀어오르던 시기였고, 예술인의 사회 참여도 활발했다. 그는 진지한 고민끝에 인기 대신 자신의 의지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마치 감탄사처럼 그저 허공에 풀어내면 그만인 노랫말 대신에 눈길조차 피하고 싶지만 세상의 본 모습을 얘기하고 노래하는 소리꾼이 된 것이다.
그리고 6월 7일부터 시행되는 "사전음반심의제 폐지"를 위해 지난 6년간 잘못된 제도와 싸우면서 가요계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 제도는 일제시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시작되어 지난 60년 이상을 버텨온 낡은 제도인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말이 심의이지 가요에 대한 사전 검열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회성 짙은 노래를 부르기 이전에도 가사 수정 등 공연윤리위원회의 부당한 요구를 수차례 받아왔던 그는 스스로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고, 심의를 거치지 않은 음반을 내기도 하면서 대항했다.
검찰에 기소된 그는 위헌 신청을 냈고 재판부는 "이유있다"며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지난해 11월 국회에서는 가요 사전검열 조항이 삭제된 법률안이 통과된 것이다.
작년 연말에 각 일간지들이 문화계의 주목할 일로 꼽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일반인들은 아직 실감하기 어렵다. 또한 앞으로 제대로 시행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공륜 심의에 따라 수정을 강요받거나 법률적인 처벌을 받는 일이 없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미 심의제에 길들여진 가요계의 관행입니다. 그러나 소재나 주제, 상상력에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껏 창작하려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라고 봅니다. 다양한 발상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문화적 포용력이 커져야 문화가 성숙하고 발전하지 않을까요.”
요즘엔 곡을 쓰고 공연하는 일 외에도 가요사전심의제 폐지를 기념하기 위해 6월 7일부터 3일 동안 있을 대규모 기념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더 바쁘다는 정태춘 님.
심의없이 정식으로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음반을 낼 계획도 있고, 지난 몇 년간 못 열었던 개인 콘서트도 이번 가을쯤엔 해야겠고, 이젠 중학생이 된 딸 새난슬이에게도 더 훌륭한 아빠가 되어야겠고···.
어느덧 창을 통해 들어선 햇살이 앞으로 그가 해나갈 많은 일들 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필자 : 조선혜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