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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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07:53
가수 양희은 님
노래는 수없이 많지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흔하지 않다. 요즘의 노래들은 함께 부르기는 커녕 따라 부르기도 벅찬 노래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랫가락에 젖어서 뭔가 늘 부족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더듬어 보고,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일상의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세상이라는 커다란 무대에 올라 이런 저런 삶을 한번 휘 둘러 보고, 향기나는 이야기도 들어 보고….
양희은 님의 노래에는 함께 부르거나 혼자 듣거나, 언제 어디서든지 간에 이런 아름다운 시간을 허락해 주는 마력이 있다.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백구, 작은 연못, 하얀 목련, 이루어 질 수 없은 사랑, 한계령, 세노야, 못다한 노래, 내 나이 마흔살에는등등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았던 그의 노래들. 청바지에 통기타가 제격이었던 그도 그의 노래처럼 어느덧 넉넉하고 편안한 모습의 중년이 되어 우리 곁에 함께 한다.
양희은 님을 찾았을 때 그는 겨우 마련한 몇 일의 휴가도 제주 공연으로 반납하고 다시 바쁜 일정 속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아주 귀국한 후로 늘 그래요. 1년에 스무날 정도의 공연을 위해 8개월은 노래 연습을 하죠. 해마다 봄이 되면 10일 정도의 콘서트를 시작해요. 그 후에는 대여섯 도시를 돌면서 지방 순회 공연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가을이 되죠. 다시 앵콜 공연을 하고 나면 찬바람 부는 겨울이에요.”
결혼과 함께 오랫동안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전집 앨범을 내고 새 앨범 "못다한 노래"를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귀국 후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양희은 콘서트"무대이다. 그의 공연은 주로 지난 날의 추억에 젖어들고 싶어하는 삼사십대를 위한 콘서트이지만,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함께 박수치는 자리로 유명하다.
마흔이 넘어서 새로 펼치는 가수 생활과 함께 기독교 방송의 "양희은의 정보시대"를 진행하며 힘찬 아침을 여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일과다. 그의 프로그램은 주부들이 꼭 알아야 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교양을 꼼꼼히 챙겨 알려주는 프로그램으로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주는 점에서 여느 주부 프로그램과는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방송 때문에 매일 오전 6시면 일어나요. 7시 15분쯤 도착하면 그 때부터 조간신문 7개 정도를 다 읽어요. 9시부터 2시간 동안 방송 진행을 하고 그리고 초대 손님 코너에 모셔지는 이들의 시간에 맞춰 녹음을 하는 일이 일주일에 두 세번, 오후에 집으로 오면 노래 연습을 해요. 반주자들이 오면 다시 연습하고 그 사람들 저녁 해 먹이고 그러면 11시죠. 쓰러져 자기 바빠요.”
연예인으로 드물게 밤인생이란 게 없다며 수더분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는 그래도 틈틈히 테니스도 치고, 자전거도 타고, 좋은 책도 보고, 공연도 본다고 덧붙인다.
“올해는 특히 가수 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 더욱 바빠요. 이번 앨범은 완전히 새로운 색깔이 될 겁니다. 또 책도 하나 쓸 계획이구요. 이 두 가지를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야 하니까 단 하루의 휴가도 없어요. 25주년이 지나 버리면 안되잖아요.”
미국에서 영구 귀국할 즈음에도 그는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자전적인 에세이를 낸 적이 있었다. 솔직하게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서 썼지만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대표곡이 금지곡이 되어 불우한 가수생활을 해야 했던 지난 날, 그 때 가슴에 차곡차곡 묻어두었던 말들을 이제 남김없이 풀어 놓으려는 것일까.
5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망아지처럼 사내 아이들과 몰려 다니며 말괄량이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딸 셋을 세워 놓고 노래 부르게 하는 것을 좋아한 아버지 덕분에 일찍 익힌 노래 솜씨, 노래 만큼이나 영어도 잘했던 경기여중·고등학교 시절, 그러나 그 행복 위로 가정적인 불행이 겹무늬져 그는 우울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좌절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은 훗날 가정 형편 때문에 가수로 돈벌이 나서는데 큰 밑천이 되어 주었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는 아침이슬에 얽힌 이야기, 명동의 오비스 캐빈 부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몇 개월 동안의 가수 생활,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일화들, 두 번의 암수술과 뒤늦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 미국생활 이야기 등도 담겨져 있다. 솔직한 고백이 담긴 그의 삶을 돌아다 보면, 시원스런 그의 목소리가 때론 아련한 아픔을 주는 이유를, 편안한 그의 모습 속에 때론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것 같아진다.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인연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모든 일이 엮어지니까요. 제 곁에는 오래된 된장 같은 사람이 많아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이기에 콘서트 중간 중간 이야기꽃을 피울 때도 많다.
“저의 존재가 세대간의 골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세대 간의 문제가 빈부 격차보다 더 심각해졌어요. 특히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중장년 층이 누릴 문화가 없습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제 바램을 실천하는 작은 시작일 뿐이에요.”
끝으로 「좋은생각」의 애독자이기도 한 양희은 님은 "절망 투성이인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로 못다한 얘기들을 대신했다.
필자 : 조선혜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