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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생명의 의지를 노래하는 대작가
kklist21 | 추천 (0) | 조회 (496)

2010-10-11 07:55

소설가 박경리 님

광복 이후 한국 소설사를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님.
그가 26년 동안 매달려 완성한 대작 "토지"는 구한 말부터 해방까지 우리 민초들의 꿋꿋한 삶을 대지적인 모성애로 그려내고 있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국민 도서이다.
“우리가 어머니라고 할 때 단순히 자식을 낳은 어머니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창조하고 길러주는 마음을 가진 것은 모두 어머니가 되지요. 생명의 의지란 무엇입니까. 능동적인 것입니다. 모든 생물 벌레나 식물까지도 모성, 생명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인간만을 위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박경리 님을 만난 것은 사단법인 "한살림"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였다. 그에게는 모처럼 마음을 낸 서울 나들이인데, 감기 몸살로 불편한 몸이어서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제 뭐, 나이 먹은 노인네인데요...”
작년 말에 칠순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녀같은 수줍음을 간직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토지" 완간 이후에도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 강의를 나가고, 수필집이나 신문 칼럼 등을 쓰며, 여기저기 그를 원하는 곳이 많아 여전히 바쁜 생활이 노작가의 심신을 크게 지치게 하는 듯하다. 특히 요즘 "토지문화재단" 일로 더욱 바빠졌다.
2년 전 토지를 완간했을 때도 문단이 마련해 준 기념잔치에 마지못해 응한 그가 아닌가. 작가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의무를 다한 것이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라는 게 한결같은 그의 지론이다.
“도시계획상 택지 개발 부지에 놓여 헐리게 되자, 원주 사람들과 문인들은 명작이 태어난 집을 보전하자고 들고 일어났었죠. 토지 문화재단도 다 주위 사람들의 덕분에 만들어진겁니다. 여러가지로 과분하고 감사한 일이지요.”
지난 80년 강원도 원주에 자리를 잡은 이래 단 한번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원주집에서 "토지"의 4,5부를 썼다. 그곳에서 때때로 만년필을 내려놓고 마루를 훔치거나 마당에 나가 풀을 뽑고, 밭을 일구면서 "토지"를 한장 한장 완성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제 얼마 후면 그곳에 작품 세계를 테마로 삼은 "토지문학공원"과 "박경리 기념관", 문학인들을 위한 세미나실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리하여 2년 뒤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명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1~2년 후에는 이사를 해야 하는데, 텃밭이 제일 아깝습니다. 천연 비료만을 써서 15년간 만든 땅인데……. 이사하면 새로 흙을 만들고 농사를 지어야죠.”
흙은 그의 문학의 근원이고, 또한 농사짓는 일은 그가 글쓰는 일 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일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문난 환경주의자다.
그의 환경론은 앞서 말한 그만의 생명 존중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많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반문한다.
"오늘날 우리의 자리가 왜 이다지 좁아졌을까.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무조차 영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던 옛 샤머니즘이 더욱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제는 인간의 평등을 넘어 생명의 평등 속에 살 때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필요한 것은 다 착취해도 좋다는 인간 중심의 오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문학이란 바로 그와 같은 생명의 의지를 다루는 일이라고 말한다.
"토지"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더불어 또 하나의 문학적 기둥을 "한의 미학"에서 찾고 있다. 지금도 그는 "내가 고독하지 않았으면 글을 못썼을 것"이라고 곧잘 말하는데, 그의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지난 삶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는 "그저 살아가듯이 글을 써왔을 뿐"이라고 자신이 이룬 모든 것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경남 통영, 지금의 충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무척 조용한 편으로 책을 좋아해 누가 읽고 싶은 책을 갖고 있으면 빌어서 밤새 읽은 후 돌려주곤 했다.
그러나 진주여고 시절 등 사춘기에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 결혼하면서 간신히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했으나, 남편이 6·25때 행방불명되면서 또 한번 상처를 입어야 했다.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얼마간의 기자 생활을 거쳐, 순수 작가로서 집필에만 전념한 그는 현대문학에 소설 "계산"으로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으며, 토지를 집필할 때는 아예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세상과 담을 쌓았다.
그러다 암수술을 받기도 하고, 사위인 시인 김지하 씨의 투옥과 투병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토지"는 그에게 엄청난 "한덩어리"를 견디게 해주었다.
이제 토지의 완간으로 한국 최고의 작가라는 명예도 얻었고, 올해만 해도 호암상 예술상, 칠레 정부가 세계문학사에 기여한 문인에게 수여하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기념 메달"을 받는 등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결엔가 예의 그 무심함으로 돌아와 있다. “요즘에는 텃밭에서 일하다가 "이제 원고 써야지"하며 일어서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어요. 이제 남은 일은 후배들에 의해 이뤄질 "토지"에 대한 평가작업을 지켜보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박경리 님은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위대한 이 시대의 대작가임에 틀림없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