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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임권택 님 한국 영화를 얘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영화감독 임권택.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는 30년이 넘도록 1백 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냈던 둘도 없는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다. 화면 구석구석까지 한국적인 숨결을 담은 영상 언어를 풀어내는 섬세한 사람이지만, 얼핏 본 그의 첫인상은 장터에서 만난 시골 농사꾼같이 소탈하다. 평소에 말수가 적을 뿐 아니라 좀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비치지 않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이지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나 혹은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달성될 때까지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열정가이다. “여가 시간요? 뭐 특별히 따로 하는 일이 없어요. 다음 작품 준비하고, 주로 그냥 쉬면서 지내죠. 여행요? 에이, 내 일이 늘 떠돌아 다니는 것인데 쉬는 동안까지 떠돌아 다니다간 집에서 쫓겨나요.” 그는 79년 다소 늦은 나이에 영화배우 채령 씨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둔 가장이다. 한편, 그가 살아온 지난 날을 더듬어 보면, 이름 석 자 앞에는 늘 한국 최고의 감독,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지금까지 한결같은 치열함으로 자기만의 세월을 엮어온 것 같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장성읍. 국민학교 때 해방을 맞은 그는 좌익 사상에 기울어 한 때 빨치산 활동을 하기도 했던 아버지를 두었다. 그로 인해 집안은 급격히 기울고, 빨치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가난을 견디다 못해 고 1때 가출을 한다. 부산에서 지게꾼 생활 등 막노동을 하다가 우연히 영화판에 뛰어들게 되면서 영화와의 숙명적 관계가 시작된다. 처음 한 일은 스태프와 연기진의 식사를 날라다 주는 일이었다. 배우들의 화장케이스와 무거운 촬영 기재를 운반하면서, 도망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 정도였다. 조명 조수 등을 거쳐 명색이 감독이 된 것은 61년 활극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으면서 부터였다. 그 후 12년 간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오락 영화를 찍어댔던 그는 스스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눈 앞에 닥친 당장의 생계가 급했기 때문에 제작자가 요구하는 대로 희망도 장래도 없는 저질영화를 찍는 것에 안주하던 시절이었다. 내 영화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부끄러운 발자취였다. 당시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땅에서 벗어나 살 수 없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은 흥행이 되거나 안 되거나 묵묵히 자기만의 세계를 영상에 담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영화 인생은 73년 영화 "잡초"에서부터 80년 "짝코"까지 8년간의 작품영화 수련기, 81년 "만다라"에서부터 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까지 8년간의 도약기를 거쳤으며,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놀랍도록 아름답게, 가슴이 시리도록 따뜻하게 전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늘 영화를 만들 때마다 기왕 했던 작품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화를 찍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끝나고 나면 스스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요…….” 그는 스스로 굳게 다짐했듯이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는 목표를 향해 청춘과 세월을 바쳤고, 결국 "서편제"라는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처음 "서편제"를 찍겠다고 결정했을 땐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과연 얼마나 관객을 모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죠. 예상 밖의 반응을 겪으면서, 영화 매체가 갖는 파급효과를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또, 영화가 거짓스럽거나 불건강한 쪽으로 영향을 끼쳐선 안되겠다는 것이 소신으로 굳혀졌어요.” 그는 서편제로 제 1회 상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따내 국제적으로도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물론 그 전에도 각종 국내외 영화상을 수상하였지만, "서편제" 이후에 그에게는 세계 속에 한국 영화를 심는 선구자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책임이 그의 어깨 위에 짐지워진 셈이다. 이제 그에게 영화는 단순한 직업 이상의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본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삶의 신조라고 따로 강조하는 것은 없어요. 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화 속에 다 드러나 있는데요, 뭘.”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인본"에 바탕을 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덧붙힌다. 그리고 10월 말부터는 미국 남가주 대학과 동아시아 영화연구소가 공동 개최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회고전"에 참석하고, 그 후 하와이 영화제에 참여했다가 또 다시 한국 감독의 한 사람으로 작품을 초청받은 뉴욕영화주관을 치루고 나면 거의 이 해가 마감될 것 같다고 한다. “특히 남가주 대학의 영화 행사는 세계적인 영화 작가 중 한 명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행사여서 기대가 큽니다. 어깨도 무겁구요. 제 작품이 모두 14편이 상영될 예정이고, 영화학자와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한 세미나도 열리고, 그 내용들을 담은 영어판 연구서도 공식 발간된다고 해요.”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영어로 된 "감독연구서"를 갖는 최초의 한국 감독이 된다. 또한, 명실공히 세계적인 감독으로 확고히 자리잡는 그의 또 다른 영화 인생을 펼치게 되리라.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