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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문학적 엄격을 고수한 시대의 지성인
kklist21 | 추천 (0) | 조회 (468)

2010-10-12 19:36

소설가 김정한 님

한결같음이 더욱 그리운 때다.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신념, 한결같은 느낌……. 달라진 것, 새로와진 것 만이 주목을 끄는 세상에 매서운 추위까지 겹친 탓일까. 한결같은 사람의 풍경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미수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동안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아온 요산(樂山) 김정한. 그라면 그런 그리움과 목마름을 채워 줄 것 같았다. 문인으로, 교육자로, 이 시대의 지성으로 "정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온 사람이 아닌가.
“너무 오래 살다보니 문학인생 환갑이라는 말도 듣는거지…….”
88세의 나이에 문학인생 60년. 누구도 그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될 만큼 훌륭한 삶의 궤적을 그려왔건만, 대작가는 "뭐 그리 대수롭냐"며 한사코 자신을 낮춘다.
한국 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꼽히는 요산. 그러나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에도 그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관심사는 옳은 것, 약한 것, 우리가 함께 해야할 것들 뿐이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 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부산 동대신대에 있는 그의 집 거실에 걸린 글귀다. 요산 선생은 자신의 좌우명이나 문학관을 그 글로 대신했다.
오랫동안 지병으로 투병을 해오고 있기에 일체의 외출을 삼가하고 있고, 그런 탓에 얼마전 있은 문학 60년 기행행사겸 제 13회 요산문학상 시상식장에도 나가지를 못했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여전히 넉넉한 마음과 온화한 표정, 여유있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몇년 째 미음만 드시는 선생을 위해 하루에도 몇 가지 미음을 만들어 대는 부인 조금분 씨의 알뜰한 보살핌. 현대사의 굴곡을 저항 정신으로 해쳐 온 아버지를 둔 탓에 함께 어려운 세월을 넘겨 온 장성한 2남 5녀의 효심, 여러 후배 문인들의 존경과 흠모. 겉보기엔 조용한 생활 가운데에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 모든 것을 순리대로 행해 온 그의 의지력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기력이 크게 떨어져 5년 넘게 해 온 자서전 쓰는 일도 요즘에는 거의 불가능해요. 지금까지 1천 여장 정리해 놨는데 사후에나 햇빛을 보게될 지 모르겠어요.”
작품성이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공해를 유발하는 일이라며 줄곧 문학적 엄격주의를 지켜온 분이 손수 쓴 자전적인 원고가 무척 궁금해진다.
평생 자신의 작품 무대인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낙동강의 파수꾼이라는 그 의 별칭은 이제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그의 지난 발자취는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1908년 지금은 부산시로 편입된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요산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을 갔다. 그러나 32년 방학 때 양산 농민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본격적인 문학 인생이 펼쳐진 것은 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부터이다. 그 후 "수라도", "됫기 미나루", "인간단지", "어떤유서", "슬픈 해후" 등 반세기가 넘는 기간에 쓰여진 50여 편의 글에는 모순을 정확히 짚어내는 냉철하고 올곧은 정신이 일관되게 흐른다.
“아기가 태어날 때 "으앙"하고 울죠. 자신이 여태껏 생활해 온 환경과 맞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일종의 저항인 것입니다. 문학도 바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입니다. 헌데, 요즘 후배들은 생각이 여려서 도대체 안심이 안돼요. 무언가 딱 부러지게 하는 매운 맛이 없거든요. 사람과 밀착된 주제를 파고드는 앙칼진 의지가 아쉬울 때가 있지요.”
일제 말기인 1940년. 그는 더 이상 한글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절필을 선언했다. 오랜 침묵 끝에 66년 소설 "모래톱 이야기"로 다시 붓을 들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독재권력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되, 마치 남의 땅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따라지들의 억울한 사연들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정한은 그토록 치열한 작가 정신의 소유자이면서 또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5‧16쿠데타 뒤 부산대 교수직에서 해직되는 등 굴곡많은 현대사에 스스로 시달림을 입으면서도,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암울했던 유신시절, 기꺼이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대표위원을 맡았고, 민족문학계의 원로로 활동하는가 하면, 앰네스티 부산지부 결성에 앞장서는 등 그는 평생을 문학과 사회에 정열을 잃지 않은 현역으로 살았다.
"시대의 지성. 민족의 양심" 그에게 딱 들어 맞는 얘기다. 생각 같아서는 언제까지라도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건강이 염려되어 그럴수 없었다. 아무 얘기없이 그 정갈하고 따뜻한 표정을 마주하고만 있어도 좋겠는데. 그런 마음을 겨우 떼 놓고 돌아오는 길은 온통 안타까움 뿐이었다. 어떤 예감이 있었던 때문일까. 십 여일 후에 급작스런 소식이 들려왔다.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 하셨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어디서 그를 다시 만날까. 남겨진 작품 속에서나 참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람답게 살아라"하며 우리들에게 남겨 놓은 무거운 의무 속에서 그를 만날까. 줄을 잇는 조화와 조문의 행렬 속에서 쓸쓸한 마음에 눈 앞이 흐려진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