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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진리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kklist21 | 추천 (0) | 조회 (487)

2010-10-13 07:47

꽃동네 신부 오웅진 님

꽃동네!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해 주는 곳, 각박하기만 한 세상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고 시원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살아 숨쉬는 곳.
충북 음성에서 버스를 내려, 또 한참을 들어가는 인곡리 산자락에 자리한 그곳에서 한결같은 "머슴"의 삶을 살아온 신부 오웅진 님(52세)을 만났다. 이 분을 만나러 가는 길은 내내 흠모와 존경의 뜨거운 정으로 가득찼다.
꽃동네로 오르는 언덕에 세워진 큼지막한 돌비를 지나자, 어수룩한 얼굴에 전신이 그리 자유스럽지 못한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왔다.
신부님을 만나뵈러 왔다고 하자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먼 곳을 가리키더니, 이내 앞장섰다. 그의 가슴에는 "현관반장 베드로"라는 이름표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 베드로 형제요. 우리 중에 제일 부지런한 최고 일꾼이지요. 손발이 모두 오그라져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이곳에 왔어요. 기도와 사랑 속에서 차츰 몸이 회복되자 뭔가 자신의 일을 갖고 싶어했지요.”
오웅진 신부의 설명을 듣다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는 결코 사람이 속단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관반장 베드로 님을 비롯해 현재 이곳에는 삼천여 명의 버림받은 걸인, 고아, 병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는 수도자만 삼백여 명, 장기 봉사자 이백여 명, 그리고 일일 자원봉사자 팔구백 명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한 대식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젠 내 몸이 나 혼자의 몸이 아니예요.”
단 5분의 개인 시간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 항상 몸으로 사는 사람. 그래도 늘 행복한 사람이 바로 오웅진 신부이다.
이십여 년 전, 그는 32세의 젊은 사제로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최귀동 할아버지가 오늘날의 꽃동네가 있게 한 장본인이지요. 그 분을 보면서 끝없는 사랑의 실천만이 삶에 진정한 행복을 준다는 걸 깨닫고 용기가 생겼어요.”
젊은 사제는 호주머니 돈을 털어 성당 옆에 움막을 짓고 18명의 걸인을 모아 봉사하면서 "꽃동네"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길가에서, 다리 밑에서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꽃동네로 인도해 주십시오. 꽃동네는 그런 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택시에 태워 보내 주시면 택시비를 드리겠습니다.”
나라도 못한다는 가난 구제, 걸인 구제, 밑도 끝도 없는 그 길을 실천하기 위해 블록 한장, 사랑의 마음 한줌 나눠달라며 안 찾아간 곳이 없다는 오웅진 신부. 덕분에 그는 거지대장, 부랑인의 대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81년부터는 한 사람이 매달 천원 이상씩 후원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더 많은 불행한 이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그의 선행이 차츰 알려졌고, "꽃동네"를 후원하는 이들도 계속 늘어갔다. 작년에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 상도 받았다.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 현상은 사랑으로밖에 치유하지 못합니다. 또,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전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제 신념이죠.”
그의 이 신념이 기적을 이루었다.
꽃동네를 후원하는 사랑이 하나 둘 늘어 지금은 후원 회원이 76만 명을 헤아린다. 그렇게 모인 평범하고 스스로도 가난한 이들의 성금이 꽃동네에 더 나은 시설을 마련하고 제 2, 제 3의 꽃동네를 만드는 기적을 만든 것이다.
꽃동네의 기적은 물질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곳을 다녀가는 자원 봉사자가 한해에 24만 명. 그들은 이곳에 봉사를 하러 왔다가 사랑을 배우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랑을 전한다. 꽃동네는 우리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랑의 교육장이 된 것이다.
이토록 큰 일을 이루고도 자신을 한없이 낮추기만 하는 오웅진 신부는 충북 청원군 산골 가난한 농가의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집안은 진학을 포기할 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가 계셨다. "너는 나라의 큰 일꾼이 될 사람이야. 그러니 모든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나무장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면서 독학과 고학으로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나의 소망과 꿈은 똑 같아요.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고 그들의 죽음마저 대신하고 싶습니다. 주님도 그러셨어요.”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는 오 신부의 눈매가 촉촉히 빛난다. 고락의 세월을 함께 견디며 어울려 사랑의 실체를 만나고 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던지면서.
“올해는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을 열어 잘 운영하고, 경남 거창에 제 3의 꽃동네를 건립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후원회원이 더 많이 늘어나 이 일이 잘 진행되면 좋겠어요.”
버림받은 이들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일에 자신을 바치겠다는 오웅진 신부님께 "좋은생각"은 어떤 생각이냐고 물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사랑없는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