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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작은 것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그림꾼
kklist21 | 추천 (0) | 조회 (485)

2010-10-13 07:48

판화가 이철수 님
충북 제천군 백운면 평동 2리. 판화가 이철수 님이 살고 있는 박달재 아랫마을 입구 다다라 버스에서 내렸다. 생각보다 작지 않은 마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먼데로 시선을 뻗으니 저 멀리 산 바로 아랫자락까지 이어지는 집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집"을 물으라고 했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때마침 지나가는 촌로 한분을 붙들고 물었더니, 싱거울 정도로 단박에 이리저리 가라고 일러 준다. 마을 어귀에서 공동 창고, 작은 가게, 과수원을 차례로 지나 집을 찾아가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철수 님의 "소리 하나".
“소란스러운 소리는 늘 위로 솟구치지만 / 조용한 자리에 다정한 소리는 낮은 데를 찾아서 / 걸어내려 오듯 합니다 / …어디나 산 아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 있거니 / 그 마음으로 들어야 알게 되는 마을 소식은 따로 있습니다 / 마을소식 모르고서야 그곳에 폐를 끼칠 수 없으므로 / 물 한 그릇도 청하지 못하고 지나옵니다….”
그는 반갑게 손님을 맞아 작업실로 안내한다. 간결한 선과 점, 그리고 여백으로 시적인 영혼과 서정적인 상상력을 일깨우는 그의 그림에 걸맞는 묵직한 선승의 향기를 기대했건만, 그는 마치 장난기 많은 막내 오라버니 같은 모습이다. 나무 향기 가득한 작업실 곳곳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수북이 걸려 있다. 극도로 절제한 그림에 곁들인 글, 드러나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느끼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이 새삼 정겹다. 누군가 그의 작품을 두고 "칼을 잡은 시인이 그려 보는 세상 이야기"라 했던가.
“감탄은 원치 않아요. 공감이 어울리죠. 제 그림은 결론이 아니라, 계기일 뿐이니까요. 제 작품을 보면서 삶의 재미나 깊이, 삶다움을 찾아내는 데 이런 관점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자신의 작품이 다만 많은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태도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이철수 님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중에도 나무판과 칼을 놓지 않는다.
“농사도 지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여기저기 연재하는 것도 있고…. 제한된 시간에만 작업을 하니, 욕심껏 그림 그릴 시간이 있어야죠. 그래서 칼을 손에서 놓질 못해요.”
어찌 보면 그는 참 욕심 많은 사람이다.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등 여덟 권 가량의 작품집을 발간하고, 여기저기서 의미 있는 전시회를 여는 등 아주 왕성하게 활동해 온 작가가 아닌가. 게다가 우리 시대 제일의 목판화가라는 명성까지 얻은 그가 아직 욕심껏 작품을 해보지 못했다니…. 그를 좋은 사람으로 꼽는 이유 속에는 이런 예술가적 열정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물질 문명을 향해 쏟아져 들어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그런 흐름에 대처하지 못한 사람은 낙오자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빨리 간다고 꼭 좋은 것일까요. 자기 걸음걸이, 자기 호흡을 소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확고한 그의 신념과 그의 작품 세계는 이철수 님의 지나온 나날과도 무관하지 않다. 1954년 서울 안암동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표현처럼, 가난을 한 식구처럼 여기면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낸다. 헌 책방을 뒤지며 독서로 허기를 채운 사춘기.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돼 군에서 제대한 뒤 홀로 그림 공부에 몰두하며 화가의 길을 걸었던 그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은 78년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그는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민초의 삶과 정서를 지향한 작품들로 인해, 한때 그의 작품집은 판금 서적이 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자기 내면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죠. 문학에 대한 열망도 강했구요. 그림이요? 초등학교 일학년 미술 시간에 선생님에게서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줄 알고 내내 이렇게 사는 거죠. 허허.”
그는 얼굴 가득 넉넉한 웃음을 담는다.
이후 화가로서 그의 활동은 86년부터 정착해 살아 온 제천 평동리 생활과 떼놓을 수 없다. 그는 괜찮은 화가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파 서울을 떠났다고 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의 참 모습을 배웠고, 현실에 대한 번민은 농촌의 흙과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한 차원 깊이를 더해 갔다. 11년째 함께 농투성이의 가족으로 살아 온 아내 이여경 씨와 아들 장환, 딸 가현도 그의 예술 세계를 지켜 주는 중요한 버팀목이다.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자. 아이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에요. 스스로도 늘 마음에 새기는 말이구요. 누구에게나 겸손한 마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한 때라고 생각돼요.”
특별한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며 세태를 꼬집는 이철수 님. 그는 스스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 "보통의 것이 대우받는 세상을 위하여 작은 것을 통해 그 위대함을 알리는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전쟁을 함께하자고 말한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