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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윤석중 님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또 바다로 강으로 달려가 뛰고 구르는 아이들. 그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침없는 웃음은 한여름의 풍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그렇다. 여름은 동심이 살아나는 계절이다. 어른들도 덩달아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그런 계절이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실컷 뛰놀다가는 시원한 그늘에서 땀을 식히면서 목청껏 부르던 노래들도 그립다. 그래서 한평생 어린이의 친구로 살아온 분을 만나러 갔다. "고추 먹고 맴맴" "앞으로" "퐁당퐁당" "고향땅" "기찻길 옆" "어깨동무" "나란히 나란히" "우산" "옹달샘" "먼길" "기러기떼"…. 제목만 들어도 정겨운 노래들을 만든 사람, 아동문학가 윤석중 님. “「좋은생각」이라구요? 거참, 책 이름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운 일인데….” 얼굴 가득 편안한 웃음을 띤 채,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책을 들춰 보는 그분의 모습이 꼭 아이 같다. 그의 나이 올해 87세.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을 아이들의 모습과 마음, 꿈을 그린 맑은 동요를 만드는 데 바친 것이다. 그의 동요는 5백여 곡 이상이 노래로 불리어져 더욱 친숙한데, 4대째 대대로 물려받아 부르는 노래도 있다. “얼마 전에 TV에 나갔는데요, 방송국 젊은이들에게 나, 이런데 잘 안 나간다고 했어요. "저 사람 여태 살아 있었어?" 하며 놀라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더니 폭소가 터졌어요.” 가까이서 접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듯 윤석중 님은 농담을 즐기고 어떤 자리든지 즐겁게 만드는 분이다. 그는 항상 나이를 셋으로 나눠 먹고 산다고 한다. 생각은 열 살이고 마음은 서른 살이고 몸뚱이는 여든일곱 살이라는 것이다. 민요와 함께 우리 민족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는 국민의 노래, 우리 동요를 말할 때 꼭 따라붙는 이름, 윤석중 님. 그는 1911년 5월 25일 서울 한복판 수표정 13번지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는 외갓집에서 자라면서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외가에서 가까운 교동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창가 시간에 일본말로 "하루"라는 노래를 가르쳐요. 그때 나는 우리 나라에도 봄이 버젓이 있는데 왜 하루인지 궁금해서 어른들에게 물어 보니 나라를 빼앗겨서 그렇다고 해요. 어린 생각에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봄"이라는 동요를 지어 「신소년」 잡지에 보냈는데 그것이 실리면서 계기가 되었지요.” 조선말을 하지 말라는 일본에 대한 반항이 어린 문학가를 만든 것이다. 어린 윤석중은 열서너 살에 동요를 만들어 발표하고, 어린 글벗들을 모아 「꽃밭사」 「기쁨」 「굴렁쇠」 같은 등사판 잡지를 만들었다.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는 해에는 동아일보 신촌문예에 그의 동화극 "올빼미"가 입선되었으며, 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에 응모한 "조선물산장려"가 일등으로 뽑힌 뒤부터 본격적으로 동요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파의 뒤를 이어 어린이지를 주관하고 「소년중앙」 「소년」 「유년」 등 어린이 잡지의 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더욱 바빠졌다. 일제의 금지로 아홉 해 동안 그냥 넘긴 어린이날을 다시 부활시키고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었으며, 우리말로 된 졸업식 노래 "빛나는 졸업장"도 만들었다. 또한, 서울에서 강원도, 제주도까지 온 나라를 돌면서 교가 지어 주기 운동도 벌였다. 지프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가를 지어 주던 그 시절, 그는 스스로를 즐거운 노래 나그네로 불렀다. 이런 그의 발자취는 「윤석중 동요집」, 「어린이와 한평생」,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30권)」, 「여든 살 먹은 아이」, 「반갑구나 반가워」 등의 저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그는 행동하는 문학가였다. 56년에 새싹회를 창설해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으며 소파상, 장한 어머니상, 새싹 문학상 등 많은 귀한 상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문학적인 공로와 사회적인 공로로 그는 또한 많은 상을 받았는데 3.1문학상, 외솔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문학상, 세종문학상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특히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에서 “나의 직책은 문학가이지만 길이길이 어린이를 돌보는 작은 시중꾼이 되겠노라”는 내용의 감동적인 연설을 하여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약속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도 매일 아침 8시 30분이면 새싹회 사무실로 나와 어린이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쉼 없이 신작 동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어느덧 새싹회가 마흔 돌을 지났어요. 나의 마지막 소원은 나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작품을 한편이라도 더 남기고 싶다는 것이죠.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동심으로 돌아간다면 사회가 더욱 아름다워지겠지요.” 그러나 동요를 시시하게 생각하는 요즘 풍토나 고마운 것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이 안타깝고, 생활 속에 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쓰는 일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며 최근의 창작 동향을 들려 준다. 그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현역, 영원한 동심으로 남을 그런 분이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0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