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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파를 썬다.
gura892 | 추천 (0) | 조회 (452)

2010-11-02 08:22


고독이 밀려오는 것은 가로등이 둥글게 빛을 떨구는 밤의 플랫폼에 내린 시각이다.
0.1초인가, 0.01초인가, 하여간 플랫폼에 한 발이 닿은 찰나,
어떤 낌새가 스쳐, 난 아차하고 생각한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나는 이미 고독의 손바닥에 푹 싸여 있는 것이다.

아파트에 도착해 나는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놓고,
반지, 귀걸이를 빼고, 손목시계를 풀고, 스타킹을 벗는다.
그리고 커튼을 친다.

벗은 옷을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고 나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다.
몸이 무겁고, 머리도 무거워 빈사상태다.
데굴데굴 굴러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아앗, 우웃 하고 신음해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팔다리를 파닥거려 본다. 고독은 1그램도 줄지 않는다.

" 바보같아. "

나는 얼굴에 흩어져내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팩에 바로 입을 대고 마신다.
제대로 컵에 따라 마시기보다는 고독하지 않은 기분이 들기에.

나는 주소록을 뒤적여
아직 귀가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이 없는지 생각한다.
이렇게 전화를 마구 걸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고독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혼자 방에서 멍하니 TV라도 켜서 떠들썩한 소리를 흘리면
한층 고독해지는 것과 같다.
누구라도 천지신명에 맹세코 누구라도 타인의 고독은 구원할수 없다.

세면대에 가서 콘택트 렌즈를 뺀다.
거울에 비친 흐릿한 얼굴.

젤 타입의 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우고, 세심하게 얼굴을 씻으며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이따금씩 경련을 일으키듯 오열하면서
나는 언제까지고 얼굴을 계속 씻는다.

뺨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얼굴을 씻고, 두툼한 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는 그런 다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런 밤은 파를 썬다.
잘게, 잘게, 정말로 잘게.
그러면 아무리 울어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해결된다.
파의 색, 파의 모양, 파의 냄새,
손 끝에 보들보들하게 느껴지는 파 표면의 감촉.
파를 써는데 다시 눈물이 밀려온다.
눈앞이 엷은 녹색으로 흐려진다.
나는 울면서 파를 썬다.
밥솥의 스위치를 켜고 파를 썰고, 된장국을 끓이며 파를 썰고,
두부를 자르고 또 파를 썬다.

일심불란하게 마치 기도인지 뭔지처럼.
누군가에게 혼이나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난 마음을 고쳐먹고 싶은 것일까?

뭘 어떻게.

작은 식탁을 차리며 나의 고독은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다.
흐느끼며 젓가락을 놓고 간장 종지를 꺼낸다.
산더미처럼 썬 파를 된장국에 잔뜩 넣고, 찬 날두부에도 잔뜩 끼얹는다.
내일이 되면 상쾌한 얼굴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회사에 갈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울음을 그치고 밥을 먹는다.


차가운밤에 / 에쿠니가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