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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그래, 고작 그러한 것.
gura892 | 추천 (0) | 조회 (468)

2010-11-03 09:24


그래, 나는 너를 오래 만나기보다 오래 기억하길 원한다.



그녀는 단 한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또 읽어야 하는 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데 한 권밖에 없는 책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고약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생이 어떻든 가능하고
마침내 그게 생의 전부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 모두가 그렇게 훌쩍훌쩍 사라져가 버리는 거예요.
여직 그것도 모르셨나요? "




사람에겐 흔히 상대적인 진실이란게 있어서
서로가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요컨대 이쪽 마음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는 저쪽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 마음의 정체까지 모르고 있다면
정녕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한때는 사랑을 염주처럼 목에 걸고 살고 싶었다.
그토록 투명한 갈뫼빛 사랑을.

그런데 어느 날 단 한 번 헛디딘 발이
이렇듯 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줄이야.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나는
내게 남겨진 것이 막상 젖은 소금 한 되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은 아마 백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을 볓 겹의 깊은 상처.
그 앞에 놓은 한 그릇의 짜디짠 소금.

나날의 쓰라린 문댐.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너와 나의 고달픈
그러나 매순간이 숨찼던 사랑.

생은 또한 하루 24시간 동안 무작위적으로 방영되고 있는 위성방송 앞에
잠시 무릎을 접고 앉아 있다 사라지는 것.

이윽고 동공에 모래알처럼 남는 영사의 자잘한 파편.
한 칸 한 칸 죽음을 건너뛰지 않고서는 바꿀 수 없는 채널 부호.

처마 밑에 춥게 웅크리고 앉아 있던 2월의 제비.
그가 남긴 현관 앞의 배설물. 그래, 고작 그러한 것.



윤대녕 /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