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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gura892 | 추천 (0) | 조회 (436)

2010-11-0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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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ew
Subject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음이란 사용하는게 아냐.
마음이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지.
바람과도 같은거야.
당신은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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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것은 당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건가 보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때 당시에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이해할 때도 있어.

그러면 대개의 경우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리지.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거야."

"마음이라는 것이 무척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고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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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는 온갖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계속 잃어 온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상징하는 코트 주머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적인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떠한 바늘과 실로도 그것을 꿰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 방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안으로 불쑥 들이밀고는
"너의 인생은 제로야!"라고 내게 소리쳤다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한번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대며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 그 계속 잃어버리는 인생이 -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자신이 되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리고,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

내가 좀더 젊었을 때는,
마치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카사블랑카에 바를 열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지인이 되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으로 - 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인지 아닌지는 접어 두고 -
나의 자아에 어울리는 더 유익한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변혁하기 위한 훈련까지도 했다.
<<녹색혁명>>도 읽었고, 심지어 <이지라이더> 같은 것은 세 번씩이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매번 마치 키가 구부러진 보트처럼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또다시 나였다.
나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머물면서, 내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절망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절망인지도 몰라.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 부를지도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이라면 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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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나이든 사람과 같이 있었던 거야.

천재적이고 압도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세상엔 그런 사람만 있는게 아니거든.

모두들 평범하고, 손으로 어둠속을 더듬듯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나 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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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계 바늘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철저하게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자기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간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그 전제를 없애 버리고 나면 뒤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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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바람처럼 그 아코디언 소리를 그녀에게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치 새처럼 마음을 그 바람에 맡겨버리면 신경쓸 일이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때로는 어둡다고 할지라도,

어떤 때에는 새처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영원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아코디언의 울림 속에조차 나는 내 마음을 잠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