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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거리의 스승으로 살아온 팔십 평생
kklist21 | 추천 (0) | 조회 (383)

2010-12-11 16:22

YMCA 명예총무 전택부 님

어느 시대건 세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저 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삶조차 돌보지 않고 늘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 그가 펼치는 크고 작은 실천들이 그립다.
우리들에게 "오리 선생님"으로 알려진 전택부 님을 만났다.
“사랑방 중계요? 7년 정도 했지요. 처음에는 뜻밖의 일이라 사양했어요. "나는 그저 보통 사람이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꾸 와서, 이게 바로 보통 사람들의 프로그램이라는 거예요. 그럴듯하다 싶어서 수락했지요. 평소에 지위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사람 대접 못 받는 세상을 괘씸하게 생각해 왔거든요.”
그는 평생 수수하게 상식인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생각을 지니며 살아왔다고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식적으로 사는 보통 사람들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을 그리면서.
“성서에서도 인생을 나그네살이로 규정하고 있어요. 하늘에 본향을 둔 사람이 세상에 나와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지요. 다른 것보다 가장 먼저 하늘의 나라와 땅의 나라, 그 나라의 의를 구하라는 거예요. 새길수록 정말 옳다 싶어요.”
그는 늘 세상 풍조에 흔들림 없이, 권력이나 명예를 쫓지 않고, 평범하고 가난하지만 의롭게 살려고 했다. 늘 스스로를 거리의 스승으로 자처하면서.
이런 그의 생각은 그의 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세 개의 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름에 오리 "부"자가 쓰인다고 해서 오리, 또 고향이 문천인 사나이라는 뜻으로 문정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등걸인데 그 뜻이 정말 깊디깊다.
“매화는 참 아름답고 향기롭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데, 그걸 지탱해 주는 것은 뭡니까. 보기 흉하고 우중충한 등걸이지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 지었어요.”
전택부 님은 1915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순조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원산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고, 또 한때 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사회주의 사상에도 이끌렸다. 그래서 감옥살이도 하고 5년제 학교를 8년 다닌 끝에 간신히 졸업했다.
졸업 후에 그는 일본 도쿄신학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민족 정신이 투철했던 그에게 일본 유학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공부는 중도에 좌절되었다. 그 후 그는 우리말,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으로 옮겼다.
“청소년 시절부터 우리말, 우리 얼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학자는 아니지만 한글 정신을 보급하는 일에 늘 참여해 왔죠.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토박이 신앙도 주장해 왔어요.”
그는 "52년에 어린이 잡지 「새벗」의 주간을, "54년에는 월간 「사상계」 주간을 지냈다. 물론 그 뒤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 국어순화추진회 운영위원장, 외솔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한때 그는 한국신학대와 중앙신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늘 우리 사회에 이름없는 사람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었다.
1957년 서울 YMCA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런 생각과 맞물려 있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 YMCA를 위해 일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YMCA는 청소년 사회 단체인데, 가장 핵심적인 정신은 바로 화합정신입니다. Y정신은 바로 하나 되는 정신이니까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이 화합정신인 것 같아요. 그런데 모두 싸움만 하고 있으니….”
한편, 그는 「월남 이상재」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한국기독교청년회 운동사」 등 20여 권의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중 강연도 많이 했지요. 과로로 병을 얻어 3~4년 쉬면서 중단되었지만 지금은 건강이 좋아요.”
너무 열심히 살아온 끝에 병을 얻게 되자, 오히려 모처럼만에 한가로운 일상을 얻었다며 웃는 전택부 님.
그는 여전히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기저기 수필도 쓰고, 우리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을 갖게 하는 연구서도 써 낸다.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 학자들이 서로 어울려 민족겨레문화를 연구하는 모임인, "그리스도와 겨레문화연구회"라는 단체의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화상을 그리듯이」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
「좋은생각」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를 부탁 드렸더니, 대번에 "제법으로 살아라"라고 답한다.
“어린아이가 대소변을 가리게 되면, "어, 그 녀석 제법이다"라고 하지요. 그것이 뭡니까. 제 스스로의 법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 그 말처럼 우리 모두 제법으로 살아야 해요.”
사회운동가로서, 참 신앙인으로, 저술가로, 이 시대 모든 이들의 스승으로 살아온 전택부 님. 오래오래 우리 곁에서 든든한 나뭇등걸 같은 분으로 남기를 바란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