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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한국 오페라의 어머니
kklist21 | 추천 (0) | 조회 (478)

2010-12-12 14:23

김자경 오페라 연구원 원장 김자경 님

서울 대신동 금화 터널 옆에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산비탈 한쪽으로 고즈넉한 정취를 품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울타리 대신에 야산의 나무들이 사방을 두르고 지붕에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하얀 삼층집…. 입구에 "김자경 오페라 연구원"이라 쓰인 작은 푯말이 붙어 있다.
간간이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아침부터 벌써 오페라 연습이 시작된 모양이다. 11월에 올리는 쉰세 번째 공연 준비로 요즘 오페라단 연습실엔 모임이 부쩍 잦아졌다. 더욱이 이번 공연은 판소리 "춘향전"을 신창악으로 만든 우리의 오페라여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큰일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있는 이가 바로 김자경 님이다. 이제는 대충해도 웬만한 오페라는 거뜬히 해낼 수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못한다.
“오직 진실하고 성실한 것만이 감동을 주는 법이야. 그것은 진리거든.” 분주히 움직이는 그는 이미 여든 살의 연세를 잊은 것 같다. 춘향전뿐만 아니고 11월 26일에는 또한 그의 독창회도 있어 요즘 들어 더더욱 바쁘다.
한국 오페라의 어머니 김자경 님. 한국 최초로 민간 오페라단을 창단해서 무려 30년을 이끌어 온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오페라나 다름없다.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처럼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아온" 역작의 인생이었다 할까.
1917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목회자 가정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자라났다. 당시는 딸들이 그리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이지만, 그의 부모님은 남다르셨다고 한다. 누구보다 딸을 자랑스러워하셨고, 언제나 딸에게 용기를 주셨다. “아버지는 늘 그러셨지. 우리 자경인 열 아들 부럽잖은 큰사람이 될 거라고. 어머닌 하루도 거르잖고 날 붙들고 기도하셨다우. 우리 자경이를 통해 주님의 빛이 세상에 비치게 해주소서 하고 말이지. 두 분의 그 말씀이 나를 만든 게야.”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든 지는 것을 싫어했다. 노력해서 되는 일이라면 반드시 일등을 하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 믿었던 까닭이다. 그는 1940년에 이화여전 성악과와 피아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는 신인음악회에 출연하면서, 부모님의 바람대로 음악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듬해 이화여고에 봉직하면서 남편 심형구 화백을 만나 결혼했는데,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펴 나갔다.
1948년 1월 그는 명동 옛 국립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를 노래했고(비올레타 역), 그 해 8월에는 뉴욕 줄리어드 음대로 유학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그의 꿈이었던 메트로폴리탄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그의 음악 인생은 세계를 무대로 하는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뒤 김활란 총장의 부름으로 1958년에 귀국해 이화여대 강단에 섰는데, 그 무렵 그의 인생에 큰 고비가 찾아왔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남편을 그만 사고로 잃은 것이다. 그 뒤 한동안 그는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이제 더는 못할 것 같더라구. 재혼해서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때 꿈속에 어머니가 찾아오셨어. 자경아,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 하시는 게야.”
두 갈래 길에서 주춤하다가 결국 그는 오페라단 창단이라는 가시밭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누구 하나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 성악하는 사람들까지 고개를 흔들었으니깐. 근데 참 이상도 하지. 이게 내가 갈 길이고 내 사명인 것처럼 믿어지니 말이야.”
어려움 끝에 1968년 5월 1일, 김자경 오페라단은 창단되었고 그 첫 공연으로 "춘희"를 2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집 문서까지 잡혀 가면서 한해 두해를 넘기며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에게는 오페라를 그만둘 수 없는 큰 이유가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나비부인"에 필적하는 한국의 오페라를 세계 무대에 올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G. 메노티(현존하는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에게 부탁한 "시집가는 날"과 김동진 선생이 50년의 산고 끝에 완성한 "춘향전"인데, 특히 "시집가는 날"은 김자경 오페라단 30주년, 한국 오페라 50주년 기념작으로 내년 5월쯤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 한다.
오페라 공연과 병행해 온 독창회도 올해로 벌써 20회를 맞는다. 1987년 일흔의 나이에 카네기 홀에 다시 섰을 때는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 문제야. 내가 이 나이까지 무대에 서는 건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게지. 나를 보면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희망을 갖지 않겠어?” 여든의 고개에서 들려 주는 삶의 노래는 어쩌면 노래이기 전에 인생의 귀한 메시지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인지 모른다.
그는 요즘 오페라 연습 외에도 동양화와 서예를 하고 각국의 우표를 수집하는데, 내년에는 작품 전시회를 가질 거란다. 그리고 벌써 두 번을 옮겨 쓴 성경은 다시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
팔십의 나이를 잊고 만년 청춘으로 살아가는 김자경 님, 늘 진실하게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귀띔해 주는데… 그 황혼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다.

필자 : 이윤주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