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l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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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2 14:25
위기니, 파탄이니, 폭등이니 하는 말들이 귓가에서 떠날 날이 없었던 탓일까. 이 겨울엔 난롯가에 앉아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가벼워지는 주머니, 예상할 수 없는 내일, 그늘진 얼굴들…. 그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한 일이다.
경영 컨설턴트이자 방송인으로 잘 알려진 정보전략연구소 소장 윤은기 님. 그 또한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희망에 대해 얘기하며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의 위기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 발전이나 사회의 민주화가, 꽃은 피었지만 열매는 맺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라도 냉정히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채운다면 세계 속의 한국으로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신념과 꿈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양심과 도덕성의 회복이며,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 공부에 힘쓸 때라고 말한다.
정보 전략, 시테크 등 수많은 경영 개념을 보급하면서 첨단 정보 사회를 이끄는 데 앞장서 온 그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양심이나 마음이라는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만나면 결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경제나 정보같이 딱딱한 말들도 그를 한 번 통하면 따뜻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장점은 그를 한 분야의 전문가에서 한 사람의 사회 인사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충남 당진의 한 시골마을에서 칠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그의 꿈은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마치고 공군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첨단 과학과 정보의 위력을 경험하면서 그의 길은 달라졌다. 미래는 정보 사회라는 것을 남보다 먼저 확신한 그는 종합무역상사에 들어가 기업 정보화의 최전선에서 뛰게 된 것이다. 그는 특유의 근면성으로 정보와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면서 노력한 결과 정보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머물 수는 없었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경영 컨설턴트라는 색다른 직업의 세계로 뛰어들게 만든 셈입니다.”
지난` 83년, 그는 장래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기업에 정보전략을 지원하는 연구소를 차렸다. 하지만 너무 때이른 시도였던지 많은 빚을 지는 등 시련이 계속되었다. 때론 후회도 했지만, 그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자 차츰 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강의와 컨설팅, 방송과 집필 등으로 그의 명성은 소리 소문없이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만 해도 줄잡아 삼십여 만 명. 그의 강연은 기업체나 공무원 연수원, 대학뿐만 아니라 종교단체나 사회단체 등에서도 펼쳐졌다.
그는 이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강사다. 하지만 사회봉사단체나 군부대에서는 강연료를 받지 않았다. 지식을 나눔으로써 사회에 봉사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편,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경영학 석박사 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그 동안 그는 열여섯 권의 책을 썼는데, 그중에서 특히 정보학 특강과 시테크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요즘은 방송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편입니다. 매일 저녁 여섯시부터 두 시간 동안 라디오를 통해 "생방송 오늘"이라는 시사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줄잡아 하루 오백만 명이 듣는 방송이다보니, 어깨가 무거워요.”
물론 그는 예전에도 "성공시대" "달리는 정보시대" "직업세계"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 특히 방송인으로서의 역할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전함으로써 내가 하는 방송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찾아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역사의식마저 느끼게 돼요.”
방송이 끝난 후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으면 열시 반. 그러나 그때부터 각종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을 훑어보고 밤 한시쯤 비로소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여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나마 지방 강연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 시간에 그는 이미 서울을 떠나고 없다.
한편, 그는 정보전략연구소 일만 해도 벅찬데, 생산성학회 부회장, 환경운동연합회 지도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대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듯이 보인다.
“바쁘다고 해서 그 속에 묻히면 안 돼죠.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선행을 하고 한 가지 이상 아이디어를 내면서 살자는 신조로 삽니다. 또 앞으로 십 년 간은 한국형 경영이론을 정립하고 보급하는 일을, 그 후론 청소년기의 꿈인 작가로서 새로운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도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 작품 구상과 습작을 계속하고 있다는 윤은기 소장.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오는 사이에 벌써 사십대 중반을 넘겼다. 그런데도 그는 이제 겨우 절반을 왔다며, 다시 거친 미래를 향해 뛰어갈 채비를 차리고 있다. 이는 그의 고백처럼, 늘 최고보다는 최초가 되겠다는 자세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8년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