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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 박동진 님 부채를 든 손을 따라 푸른 도포 자락이 펼쳐지고, 힘껏 내지르는 소리에 무대는 단숨에 꽉 차 버린다. 같은 이야기도 그를 거치면 더욱 맛이 나고 웃음이 두 배로 터진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의 소리에는 "봄날 꽃바람 같은 달콤함과 한여름 소낙비 같은 시원함"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여든셋의 나이에 접어 든 박동진 님. 이제 그만 "국악계의 거목"이라는 명성을 지팡이 삼아, 편한 세월을 보내도 좋으련만…. 새벽 네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른 아침부터 국립국악원으로 출근한 지도 벌써 오십여 년째다. “국악원에 가서 하루 세 시간 씩은 꼭 연습을 해요. 아프다고 안 하고 그러면 안 돼요. 숨이 붙어 있는 한 소리를 해야지 안 그러면 소리도 안 나오고 사설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아침마다 소리 공부에 몰두하는 일이 그에게는 연습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소리 공부 때문에 변변한 아침 생일상은 물론, 환갑이나 진갑 잔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을 정도라니. “사람이 근본을 잊으면 안 됩니다. 광대는 원래 좋은 말이에요. 넓을 "광"자에 큰 "대"자를 쓰잖아. 원없이 소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다시 태어나도 소리꾼으로 살 거요.” 아침 소리 공부만큼이나 그가 열성을 다하는 것은 공연 무대이다. 지금까지 그는 일년에 200회 이상 공연 무대에 서면서,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 해학과 익살이 넘치는 그의 소리판에서 우리 소리의 재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사람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이제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늘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 화려한 명성 뒤에는 어떤 세월이 숨어 있을까. 명창 박동진 님은 1916년 충남 공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소릿길로 접어든 것은 열일곱 살, 늦은 나이였다.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장판개, 이화중선 등 당대 명창들의 공연을 접하게 된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건 신선들이 하는 것이다. 저걸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운명처럼 소리에 끌린 후, 그는 집안의 강력한 반대를 뒤로 한 채 소리 스승을 찾아다니며 전국을 헤맸다. 토막 소리로 학비와 밥값을 벌어가면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지 십여 년. 오로지 한 길만 파는 우직한 성품은 김창진, 정정렬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로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사사받는 드문 경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소리꾼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한참 뒤인 오십대 후반의 일이었다. 그 동안에 그는 소리하고 밥이나 얻어 먹는 가객으로 떠돌았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악극단의 뒷일을 맡아 보며 세월을 보냈다. 그래도 명창의 꿈을 접지 못해, 하루 열여섯 시간씩 소리하면서 목숨을 건 백일 독공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꿈은 서양 음악에 밀려나는 우리 소리의 운명처럼 점점 멀어져 갔다. “62년, 마흔일곱 살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는 마음껏 소리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모처럼 안정된 생활 속에서 소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소리 연습에 쏟았다. 그리고 1968년에는 다섯 시간 동안 쉼없이 "흥부가" 전편을 연창하는 발표회를 가졌고, 비로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다음해에도 "춘향가" 전편을 여덟 시간 동안 연창하는 무대를 갖는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해 낸다. 그리고 그의 완창 무대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 판소리의 가치와 예술성을 높인 대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우리 소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판소리 열두 바탕 중 변강쇠타령,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등 잊혀진 것을 복원해 발표했고, 충무공 이순신전, 예수전, 팔려간 요셉 등 여러 편의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1973년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 5호 적벽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순수 예술인으로 명성을 얻는 한편, 박동진 님은 국악 대중화에 앞장서면서 많은 인기도 누렸다. 하지만 그는 작은 일에도 뽐내기를 좋아하는 세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소탈한 그의 성품은 마치 부처상처럼 반쯤 감은 눈매에 온화한 분위기를 지닌 그의 얼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내하는 것,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에 죄 안 짓고 살고 싶습니다.” 그는 성서 판소리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이다. 올해 8월쯤 공주에 그의 판소리 전수관이 완성되면 그곳으로 옮겨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계획이다. “하고 싶은 얘기? 우리 소리는 모르고 서양 것만 좋아하는 것이 늘 안타깝지, 뭐. 정말 우리 것을 소중히 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몸과 혼, 아니 일평생을 소리에 싣고 살아온 소리꾼의 눈매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의 걱정이 사라질 날은 그 언제일까.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8년 0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