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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고슴도치를 사랑하는 법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17)

2011-01-15 09:07

엄마는 다섯 살 때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내려오다가 가족들과 헤어지는 바람에 고아가 되었다.
말 못할 고생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고, 그때 만난 아버지와 결혼했다.
개천에서 용 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할머니에게 고아 며느리는 결코 예쁜 존재가 아니었다.
당연히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그러나 인물이 반듯하고, 매너 좋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아들을 보자 엄마와 나는 빈 몸으로 쫓겨났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 여자 혼자 살아가기에 사회는 냉혹했다.
엄마는 종종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 니가 안 생겼으면 내가 이 모양 요 꼴로 살지는 않을 텐데”라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엄마, 나도 이렇게 버림받은 인생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아버지한테 버려진 상실감에 비틀거리는 사춘기의 딸이 그런 폭언을 들으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 그래도 나는 밝게 살기 위해 애썼다.

어느 날 발이 너무 아파 병원을 찾아갔더니 발가락이 선천적인 기형이라 했다.
대학병원은 병원비가 비싸 동네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수술이 실패해 신경에 염증이 생겼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차라리 약 먹고 같이 죽자”라고 하셨다.
따뜻한 위로 한 마디를 기대한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진짜 죽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절뚝거리는 다리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좋은 집에서 아내와 아들에게 보여 주는 따뜻한 웃음을 내게는 보여 주지 않았다.
왜 찾아갔을까? 눈물조차 나지 않는데, 사흘을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이런 나를 따뜻이 품어 주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포근함에 나의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이혼으로 피해의식이 가득한 엄마를 보고 완강히 반대하셨다.
“네 엄마는 너를 키운 게 아니야. 그냥 짐승처럼 먹이고 입혔을 뿐이지.
사람 사는 게 그게 다는 아니잖니? 그런 엄마 밑에서 네가 무엇을 배웠을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결혼을 포기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지만, 내 엄마가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엄마를 그렇게 무시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됐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상처가 되었고 자신감마저 잃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 때문에 내 결혼이 깨졌다는 것을 모른다.
지난 세월 그 고생 중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키운 것에 대한 자부심과 보상 심리가 강한 엄마였으니.
그는 엄마 욕심에 차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잘됐다는 말까지 하셨다.

엄마는 큰 아파트, 좋은 차, 밍크코트를 입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셨지만
나는 부드러운 말투, 정갈한 음식, 단아한 옷차림 같은 것들이 더 부럽다.
엄마는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성숙한 어른이 갖춰야 할 인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무렵 30년을 홀로 지내던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외롭던 엄마에게 벗이 생겼다니 정말 반가웠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이 버젓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엄마보다 훨씬 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전문적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엄마에게 접근해 마음을 얻은 뒤 돈을 곶감 빼먹듯 빼 갔다.
엄마가 더 이상 줄 것이 없어지자 그 남자의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한다고 엄마를 협박했다.
돈을 더 뜯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당황한 엄마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변호사를 찾아가고, 경찰서에서 고소장을 쓰자 그 부부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

누가 봐도 돈 때문이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그 남자를 만난 것일까.
그해 봄은 역겨움과 현기증 그리고 두려움으로 숨이 막혔다.
남이라면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나는 내 엄마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그저 욕심을 버리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언젠가는 무뎌지리라, 하면서.
엄마는 고슴도치처럼 안으면 가시를 잔뜩 세우고 나를 찔러 대지만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온 엄마의 고생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쓸쓸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시험 앞에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을, 내 언어를 그리고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
그러다 보면 가시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