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없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가까운 국경도시 아따뿌Attapeu에서 남부 라오스의 빡세Pakse까지 이동하던 날 아침이었다.
그렇다고 이 작은 마을에 택시가 있을 리도 없었다.
보통 "뚝뚝"이라 부르는, 털털거리며 동남아시아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삼륜 오토바이택시 하나 정도는 대기하고 있었겠지만,
지금같이 여행자가 드문 시기에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터미널까지는 족히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이 더위 속에서 걷는다면 아마도 한 시간을 훌쩍 넘어설 것이었다.
“저기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이마에 송골송골 솟아난 땀도 닦고 바삭바삭 마른 혓바닥도 내보이며 내 딴에는 연민을 유발시키고자 갖은 엄살을 부려 보지만, 소용없다.
게스트하우스 앞에 할 일 없이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든, 길 건너 식당을 지키고 선 4륜구동 승용차든,
만약 태워만 주신다면 은혜를 두고두고 잊지 않음은 물론이고, 비용도 아주 후하게 쳐 드리겠다고 사정해도 라오스 사람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희한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물론 많겠지만, 그동안의 여행에서 이런 종류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처음이다.
그냥 세워 둔 오토바이를 타고 잠깐 다녀오면 적지 않은 "부수입"이 생기는 일인데도,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숙소를 구할 때만 해도 그렇다.
방이 텅텅 비어 있으면서도 방 값을 깎아 주는 데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그냥 오늘 팔만큼 팔고, 오늘 벌만큼 벌고, 오늘 먹을 만큼만 먹고서 해먹에 누워
그저 하루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리하여 걷기로 했다.
땡볕에 그대로 드러난 목덜미와 팔뚝이 타들어 가는 듯이 뜨거웠고,
아주 가끔 경찰 오토바이나 돼지나 닭을 실은 트럭이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현지인들도 걸어 다니는데 우리라고 뭐, 하는 심정으로 내린 결정이 슬그머니 후회되기 시작할 무렵,
멀리서 뚝뚝 한 대가 나타났다.
그리곤 곧장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불쌍한 여행자 부부에 대한 소문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올라타자마자 뚝뚝의 속도를 타고 바람이 불어 왔다.
좋다.
바람이 좋고, 뒤로 휙휙 달아나는 대나무 집들과 황톳길과 나무와 구름이 좋았다.
그리고 길 위에 서 있는 지금의 내가 좋았다.
사실 여행자에게 이동하는 날은 그리 만만한 하루가 아니다.
잔뜩 풀어놓았던 짐을 다시 꾸려야 하고, 도시 외곽에 있기 쉬운 버스터미널이나 역까지 이동해야 하며,
적게는 몇 시간에서 많게는 하루 종일 흔들리는 버스나 기차에 몸을 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거운 배낭을 싣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차를 몇 번씩 갈아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했을 즈음엔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일단은 침대 위에 쓰러지기 일쑤다.
그런데도 나는 이국의 한 도시에서 또 다른 어느 도시로 이동하는 걸 좋아한다.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곧 죽을 것 같다가도 바람 한줄기에 더없이 행복해하는,
길 위에서 참 단순해지는 내가 좋아서다.
그렇게 여행자는 길 위에서 욕망에 충실해진다.
감추거나 더하거나 꾸미는 것 없이, 돈이나 속도 혹은 관습에 길들여지기 전에 본래 내 안에 있었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다.
빡세행 버스는 한없이 느렸다.
엉금엉금 오르막을 기어오르다, 결국 에어컨을 껐다.
운전기사가 기세 좋게 에어컨을 켤 때 아내와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웬일인가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는 채 30분도 달리지 못하고 힘이 달려 끌끌거렸다.
물론 자연 바람이라고 나쁠 건 없다.
제대로 달리기만 한다면…….
비록 한 개 차선뿐이어도 생각보다 도로가 잘 뚫려 있었고 달리는 차량도 우리 버스 외엔 거의 만날 수 없었지만,
버스는 이상하게도 느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멈추기 때문이다.
우선 승객에게 "볼일"이 있으면 아무 곳이든 세우고,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나타날 땐 남녀노소 불문하고 반드시 태우며,
양배추나 오이나 생강 등을 실기 위해 또 한참을 멈추어 선다.
그뿐이 아니다.
소나 염소들이 도로를 가로지르거나,
어느 정신 나간 오리나 닭들이 도로에서 뛰어놀거나,
돼지들이 뭐 먹을 게 있다고 도로 한가운데를 어슬렁거릴 때마다 버스기사는 참으로 자비롭게도 "빵빵"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멈춘다.
그러고도 마침내는 아무런 이유 없이 운전사 마음 내키는 대로 한참을 그냥 섰다가 별 설명 없이 그냥 간다.
이쯤 되면 여행자의 심정은 부글부글 "끓는점"을 지나, 차라리 편안해진다.
애초의 예정 시간 따위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때가 바로 여행길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일상에서의 상식과 속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건너편 앞좌석의 남자아이가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도 내가 이방인으로 보이는 걸까.
망고며 껌이며 바나나주먹밥 같은 것들을 팔러 버스에 오른 아주머니들이 싸게 해 주겠다고 갖은 유혹을 해도
침을 삼키며 바라보던 아들을 끝내 외면하고 양초만 한 "왕라이터"만 하나 사던 아빠는 옆자리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돼지코를 만들어 그 아이를 웃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버스가 또 멈췄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창밖을 내다본다.
배추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데, 지금까지의 양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람들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도 도로로 내려섰다.
아이들은 좁은 도로를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 일손을 거들기도 했다.
우리는 버스가 가던 방향으로 걸었다.
대나무와 볏짚만으로 만든 집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곳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버스를 훔쳐보는 아이들이 있었다.
눈이 아주 예쁜 여자아이와 어린 남동생.
하루에 한 번 지나가는 이 버스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한 걸까.
어린 날에 나도 그랬었다.
철로를 지나던 기차를 보며 하루를 보내곤 했었다.
그리곤 그 기차가 닿을 세상에 대한 상상으로 오래도록 행복했던 시간들….
차장이 손짓을 했다.
버스는 "배추머리"를 하고 이제 다시 출발이라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닭과 돼지와 오리와 함께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버스는 느릿느릿 출발하고,
차창 밖으로 구름도 느릿느릿 강물도 느릿느릿 흐르는 듯 마는 듯 소들도 느릿느릿 간혹 목덜미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행자도 느릿느릿 지나는 풍경들에 손을 흔들며 또 한 꺼풀의 끈을 풀어 흘러가는 길 위에 던져두었다.
버스는 30분도 달리지 않아 다시 멈추어 섰다.
자다 일어난 노스님을 울타리도 없는 작은 사원 앞에 내려 두고 버스는 느릿느릿 다시 제 길을 갔다.
-김향미, 양학용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