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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주인과 손님
바가지 | 추천 (0) | 조회 (408)

2011-01-18 14:53

 

제주도의 중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가야 하는 제주의 벽지,
이곳 고산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작년 10월이었습니다.
처음 집으로 들어섰을 때,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방마다 창고마다 거미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갖 잡초들이 제가 가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기세와 수도세는 고인이 된 옛 주인의 이름으로 나왔고,
동네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며칠간 가만 앉아 보고 있자니,
한 마리의 개와 두 마리의 고양이가 마당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개는 오줌과 똥을 누면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였고,
고양이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길만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버린 음식 찌꺼기를 먹기도 하면서 매일 같은 길을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이 집을 차지한 자들이었기에 매사를 저어하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느리게 움직이며 집안을 청소하고, 도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옛 주인들이 하는 모양을 살폈습니다.
주변과도 단절할 수 없어서, 올레를 지나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를 불문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바람은 거세었고, 해가 바뀌었습니다.

봄이 되어 지인들을 통해 얻어 온 갖가지 야생화를 심었습니다.
차나무 꺾꽂이를 하고, 치자와 라일락도 꺾꽂이를 하였습니다.
해바라기 씨앗을 뿌리고, 목화씨도 뿌렸습니다.
동백나무도 심고, 소나무도 심었습니다.
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자기 주위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꾸지뽕나무와 여러 종류의 허브를 심었습니다.

뜰의 모양은 조금씩 변해 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개와 고양이들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왔던 길로 와서 갔던 길로 사라졌습니다.
새들도 많아서 우영팥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절반 이상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참새와 까치, 굴뚝새가 주로 보였습니다.
이따금은 까치 한 마리가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 세상의 중심이 자기라는 듯이 있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집주인이 많은 집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양이들은 고양이들의 길로 가고, 까치도 까치의 길로 나다녔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는 짐승인 나도 내 길로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나는 남은 음식을 돌 위에 부어 놓으며 개나 고양이의 굶주림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 음식을 더러는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것도 좋았습니다.
인디언의 말에 "미타쿠예오야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뜻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이랍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나 까치와 뱀이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더니, 낯선 개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온몸이 검은 털로 덮인 개였습니다.
몸통도 까맣고, 뒤도 까맣고, 눈동자도 까맸습니다.
다만 검은 눈동자를 둘러싼 자위만 갈색이었습니다.
앞마당과 뒤란에는 풀이 우거져 있었고,
검은 개는 마치 자기 집이라는 듯이 뜰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마당에 나가 보니, 그 개가 비를 맞은 채로 풀섶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김치찌개에 밥을 비벼 개에게 주었습니다.
개는 그릇의 바닥까지 핥으며 잘도 먹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도 그 개가 있기에 나는 또 밥을 주었습니다.
밥을 먹은 개는 주인에게 따르듯 내게 붙어 재롱을 떨었습니다.
나는 개를 쓰다듬으며, 만약에 집 없는 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였습니다.
집에 매일 붙어 있지 못하는 내가 산 짐승을 책임진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그 개의 거취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개를 키우자! 있는 밥 주고 수도에서 나오는 물 주면 되지.
밖으로 오래 나갈 일 있으면, 개를 데리고 가든지,
옆집에 부탁해서 밥을 주게 하면 되지."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개에게는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개는 마치 제가 살고 있는 집이 제 집이라는 듯이 뛰어다녔고,
끼니때가 되면 밥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개의 수가 늘었습니다.
검은 개가 노란 개를 불러오고, 노란개가 흰 개를 불러왔습니다.
나는 갑자기 늘어난 개의 수에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도 집 잃은 개가 많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사는 곳이 시골이라서 집 잃은 개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옆집 삼촌에게 물었습니다.

“삼춘, 이 개 주인 있수꽈?”

옆집 삼촌은, 우리 집과 자기 집 사이의 담장에, 감자며 귤 그릇을 가만 올려놓는 분이었습니다.
삼촌은 두말도 않고, “밥 줬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네.” 하고 대답하니, “밥 그릇 엎어 버려요.” 하고 말했습니다.
개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과 함께,
개는 제 밥그릇이 엎어져야 제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밥그릇을 엎었습니다.
주인 있는 개의 주인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손님이 왔다 갔습니다.
정말이지, 밥그릇을 엎었더니, 검은 그 개와 그 개가 데려왔을 개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손님이었던 셈입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다.